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598-1363(Print)
ISSN : 2465-8138(Online)
Han-Character and Classical written language Education No.33 pp.271-307
DOI : https://doi.org/10.15670/HACE.2014.33.1.271

茶山 丁若鏞의 兒童敎育 改善에 대한 總體的 考察*

金奉楠**
**영남대학교 한문교육과 조교수
*嶺南大學校 漢文教育科 教授

A Total Consideration of Dasan Jeong Yak-yong's Improvement Projects of Children's Education

Kim Bong-nam*
*Assistant Professor, Yeungnam University

Abstract

The society of Joseon was deeply plagued in the early 19th century during its latter half when Dasan Jeong Yak-yong(1762~1836) was alive. He was exiled to Janggi, Gyeongsang Province and then moved to Gangjin, Jeolla Province during the times, being detained for 18 years. However, he managed to make the plans of Gyeongsejemin across many different sectors and put them in his 500 books. He particularly intended to correct the wrong academic climate widely spread around the society, improve children's education with its problems, rebuild the consciousness of the public, and bring up true talents.Under the goal of examining his improvement projects of children's education overall, this study looked into the initiation and development of his improvement projects of children's education and shed some light onto their orientation and objectives. The study then criticized the problems with children's education in the second half of Joseon and discussed the characteristics of his theory on children's education. His books on children's education were divided into four areas, namely personality education, letters education, knowledge enhancement, and language education. Each of those areas was examined for its characteristics to explain the features of his educational theories. The area of personality education was characterized by "educational methods to develop the literary mind and open up the source of wisdom"; that of letters education by "educational methods of Chokryubangtong and individual voluntary educational methods through Jaseo"; that of knowledge enhancement by "Iligwanji-style educational methods topenetrate everything with one"; and that of language education by "Gaebigyosok-style educational methods to correct wrong doings and set the mundane world straight." The conclusion mentioned the significance of his improvement projects of children's education.

 

0115-01-0033-10.pdf2.74MB

1. 서언

 茶山丁若鏞(1762~1836)이 살았던 조선후기 사회는 깊게 병들어 있었다. 위정자들의 거듭되는 失政과 지방관들의 부정부패, 아전들의 농간과 횡포, 三政(田政·軍政·還穀)의 극심한 문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하였다. 이 시기에 다산은 정치적 기반을 모두 잃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강진으로 移配되어 무려 18년 동안 유형지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산은 끝내 經世濟民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經世致用·利用厚生·實事求是의 실학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西學에도 조예가 깊어 나라와 백성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사회·법률·행정·군사·역사·기계·농업·의약·지리·경학·언어·문자·교육·음악·문학·종교·기하학 등의 분야에 속하는 500권의 저술을 편찬하였다. 다산은 이들 저서를 바탕으로 삼아 당시 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고 병폐를 제거하기를 소망하였다. 특히 다산은 당시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잘못된 학문풍토와 아동교육의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여 대중의 의식을 개조하고 참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에 대한 총체적 면모를 고찰하고자 한다. 다산의 아동교육에 관련한 연구는 아학편에 관한 연구1)가 주류를 이루다가, 점차 연구의 범위가 넓어지고 논의가 깊어져서 다산의 소학론2) , 다산의 공부법과 강학 및 제자교학3) , 다산 정약용의 아동교육론4) ,다산의 物名攷편찬5) 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제출되었다.

 본고에서는 기존에 이루어진 논의는 가급적 생략하고, 논의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보다 체계적이고 심층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2장에서는 다산이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어서 아동교육을 개선하려고 한 이유와 목표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3장에서는 조선후기 아동교육에 대한 다산의 비판 내용을 살펴보고, 그 대안으로 편찬한 저술을 인성교육·문자교육·지식확충·언어교육의 네 분야로 나누어 다산 아동교육방법론의 특징이 무엇인지 논의하고자 한다. 맺음말에서는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2.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발단과 전개과정, 이유와 목표

 본 장에서는 다산이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와 아동교육 개선의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다산이 아동교육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이유와 목표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기존의 논저에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논의가 소략하거나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본 장에서 보완하고자 한다.

1)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발단과 전개과정

 다산이 아동교육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언제일가? 그리고 그 계기와 발단은 무엇일까? 그가 지은 小學補箋의 발문에 그 단서가 있다.

 小學補箋1권은 내가 지은 것이다. 신유년(1801년) 정월에 아이들이 小學를 읽었는데, 그것은 강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先儒로서 소학에 注를 낸 사람이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 箋注와 해석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비한 점이 있어, 내가 옛날에 들은 것을 서술하여 보완하였는데, 책이 완성되기 전에 禍(辛酉獄事)가 일어났다. 옥중에서 또 名義몇 가지를 터득하였는데, 장차 풀려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것을 보완하려고 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작 연월을 이와 같이 적어서 아이에게 부쳐 이 책의 말미에 기록하도록 하여 내가 막연하게 신상의 일을 도모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經籍에만 몰두하여, 오활하고 미련한 사람이 되었음을 표시하니, 자손들이 경계로 삼기에 충분할 것이다.6) 

 소학보전는 다산이 1801년 1월에 고향에서 小學를 공부하는 丁學淵 (당시 19세)과 丁學游(당시 16세) 두 아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비록 두 아들을 위해 지은 책이기는 하지만, 소학보전는 다산이 지은 첫 번째 아동교육 관련 저술에 해당한다. 그런데 곡산부사로 있다가 정조의 부름을 받고 내직으로 들어온 다산이, 왜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런 책을 지었는가? 그것은 다산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이 있다. 즉 반대파의 탄핵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시적 정계은퇴와 귀향7) 이 다산이 아동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점은 1800년 1월이다. 그러나 얼마 후 다산은 辛酉獄事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경상도 장기로 정배되는8)  바람에, 고향에서 자식들을 가르치며 살아가고자 했던 다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장기로 유배되고 난 뒤부터 다산의 관심은 자식들에서 벗어나 아동 교육 전반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므로 다산이 아동교육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된 발단은 1801년 2월에 일어난 신유옥사와 그로 인한 유배라고 할 수 있다.

 경상도 장기 유배 후에 다산의 관심이 자식 교육에서 벗어나 아동 전반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산이 1801년 3월 9일에 장기에 유배된 이후 爾雅述意8권9) 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평소에 아동이 문자를 공부할 때에 반드시 爾雅, 說文解字등과 같은 字書를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10)  그 지론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이아술의 8권이다. 이 책은 다산이 장기에 유배된 이후 아동의 문자 교육을 위해 일신의 크나큰 슬픔과 괴로움을 극복하며지은 勞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다산은 1801년 10월 20일 황사영백서사건 때문에 서울로 소환, 투옥되는 과정에서 이아술의를 분실하였고, 결국 그 책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 1804년 겨울에 중형 정약전이 보낸 편지를 받고, 잃어버린 이아술의를 정약전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간의 사정은 다산이 1804년 겨울에 지은 蒙學義彙序에 실려 있다.

 그 이듬해 봄에 화가 일어나서, 복암(이기양)은 단천으로 유배 되고, 나는 장기로 유배 되었다. 선배가 허여해준 것을 생각하고, 옛사람의 말을 찾을 길이 없음을 슬퍼한 나머지 爾雅와 韻書등 몇 종의 책을 가져다가 실용에 긴요한 것 6천 5백여 자를 뽑아서 뜻에 따라 갈래를 나누고 간략하게 해석하여 편집하니, 모두 8권인데, 爾雅述意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 그 사례를 확장하여 부연하고 더욱 자세하게 논술하여 一家의 가르침을 완성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또 체포되어 서울에 왔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책은 감옥에서 없어져 찾을 길이 없었다. 그때 복암의 부음을 듣고는 다시 그 책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갑자년(1804, 순조4) 겨울에 나의 형 天全(정약전의 字)이 흑산도 바다 가운데에서 나에게 책 1권을 보내왔는데, 그 제목을 보니 몽학의휘라 하였다. 그리고 그 범례를 살펴보니, 바로 내가 장기에서 편찬한 이아술의의 옛 원고였는데, 그 책에서 내용과 주석을 간략하게 한 것이었다. 아, 복암이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누구와 더불어 즐거워하랴. 그 의례와 문목 같은 것은 내 형의 편술에 갖추어졌으므로,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11) 

 위에 인용한 몽학의휘서 는 1804년 겨울에 仲兄丁若銓(1758~1816)이 지어서 보낸 蒙學義彙1권에 대한 서문이다. 이 글을 통해 정약전이 지은 몽학의휘가 다산이 장기에서 지은 이아술의를 저본으로 하여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간소화하고 그 책에 붙여 놓은 주석을 간략하게 하여 만든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전이 다산의 『이아술의』를 바탕으로 『몽학의휘』를 만든 해는 1804년 겨울이다. 그런데 이 해에 다산은 아동문자교육교재의 역작으로 꼽히는 『兒學編』3권을 완성하였다. 정약전이 다산의 『이아술의』를 바탕으로 『몽학의휘』를 만들고 있을 때 다산은 잃어버린 『이아술의』를 대신할 책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두 형제가 유배지에서 그곳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같은 시기에 각각 교재를 편찬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선생께서 지으신 『몽학의휘』가 어찌 정밀하고 엄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편집한 『아학편』2권은 2천 자를 한도로 하여 상권에는 형태가 있는 물건에 해당하는 글자를 두었고, 하권에는 物情과 事情에 관계되는 글자를 수록하였으며, 여덟 글자마다 『천자문』의 예와 같이 1개의 韻을 달았습니다만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2천 글자를 다 읽고 나면 곧바로 國風을 가르쳐 주어도 저절로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재주가 없는자는 비록 먼저 1만 글자를 읽더라도 역시 유익됨이 없을 것입니다.12) 

 다산은 중형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아학편』의 편제에 대해 소개하며 책의 우수성을 알렸다. 특히 “(『아학편』에 수록된) 2천자를 다 읽고 나면 『시경』의 국풍을 배워도 저절로 통할 것”이라는 말을 통해 이 책에 대한 다산의 자부심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약전은 처음에 薪智島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서울로 소환된 뒤에 黑山島로 이배되었다. 정약전은 유배 초기에는 흑산도에서 40km 떨어진 牛耳島鎭里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1806년 말까지 거주하였는데, 이곳에서 아동들을 가르쳤고, 1804년 겨울에는 『몽학의휘』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1807년 봄에 흑산도 沙里로 거처를 옮겨 사리 언덕에 草屋을 지어 復性齋라 이름붙이고 그곳에 沙村書室을 열었다. 그는 1815년 봄에 다시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8년 간 흑산도의 아동들을 가르쳤다. 정약전은 사촌서실을 열었다는 것을 다산에게 알리면서 記文을 부탁하였고, 다산은 沙村書室記를 지어 정약전에게 보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다산의 아동교육에 대한 생각이 들어있어 주목할 만하다.

 다산은 글의 서두에서 누에와 누에가 사는 蠶箔, 누에를 기르는 사람을 예로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즉 누에치는 잠박의 크기에 따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받기도 하고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지만, 정작 누에는 좁은 잠박에서도 편안하게 지내며 여유롭게 성장하며, 현명한 여자가 누에를 잘 키우면 마침내 실을 토해내어 고치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하늘이 백성을 여러 섬에 퍼져 살게 한 것은 누에치는 아낙이 누에를 여러 잠박에 펴놓은 것과 같다. 우리들이 섬을 잠박이란 시각으로 볼 때, 큰 것은 적현과 대하이고, 작은 것은 일본과 유구이며, 몹시 작은 것은 추자도·홍의도·가가도 같은 섬이다. 지나가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큰 섬을 부러워하고 작은 섬을 비웃는 것은 잠박과 똑같다. 그러나 진실로 박학한 군자가 있어 옛날 전적을 많이 쌓아놓고 법에 따라 가르치면, 경서의 구두를 떼고 성현의 가르침도 파악하며, 학업에 열의를 보이고 학자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나아가서는 성인과 현인도 되며, 문장도 잘할 수 있고 경세학을 익힐 수도 있다. 조그만 섬의 백성들도 큰 섬의 백성들과 다름이 없다..13) 

 누에는 기르는 사람의 정성에 달린 것이지 잠박의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사람도 기르고 가르치는 사람의 정성에 달린 것이지 사는 곳의 크기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다산은 아동들이 사는 곳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동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14) 

 다산이 사촌서실기 를 지은 때가 1807년이니, 그가 1804년에 『아학편』을 지어 강진읍내의 아이들을 가르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다산은 강진읍내의 사의재나 보은산방에 있을 때는 주로 아전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쳤으나15) ,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에는 해남윤씨를 비롯하여 주로 양반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다산은 다산초당에 정착한 뒤부터 제자 교육에 더욱 정성을 기울였고 저술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16)  특히 효과적인 교학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큰 성과를 거두었다.17)  그런데 다산이 1811년(50세) 겨울에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산에게 배움을 청하러 온 아이들이 대부분 중도에 배우기를 그만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 다산은 1801년 11월 중순에 강진현에 이배되어, 강진 동문 밖에 위치한 어느 노파의 주막집에 방을 하나 얻어 ‘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4년여를 기거하였다. 그러다가 1805년 겨울에 혜장선사의 도움으로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1808년 봄까지 2년여를 살았고, 1808년 봄에는 윤단의 배려로 다산초당에 정착하였다.

 귀족 자제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쇠약한 기운을 띠고 있고 모두 열등합니다. 정신은 책을 덮으면 곧 잊어먹고 의지나 지향은 하류를 편안히 여깁니다. 『詩』·『書』·『易』·『禮』등과 같은 경전 가운데서 은미한 말과 미묘한 논의를 때때로 한번 말해주어 그들이 배움으로 향하도록 권해 주면, 그 형상은 마치 발을 묶어 놓은 꿩에게 쪼아 먹기를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곡식에 나아가게 하여 주둥이와 낱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 장차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곳의 몇몇 고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전라도)가 모두 그러합니다. 근래 서울의 귀족자제들은 물고기나 새, 노루와 토끼를 잡고 놀면서도 六經을 쥐고만 있으면, 진사 2백 명 중에 앵삼(연소자로 생원ㆍ진사가 된 자들이 입는 황색예복)을 입은 연소자가 매번 50명을 넘고, 대과급제 또한 그러하니, 세상에 다시 文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인재는 찾을 수가 없고, 혹 보잘 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이름이라도 적을 줄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모두 하천민 출신들입니다. 사대부들은 지금 말세의 운을 당하여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18) 

 다산은 윗글에서 자신에게 배움을 청하러 온 해남․강진 일대의 귀족집안 자제들의 나약함과 열등함을 탄식하였고, 그리고 더 나아가 온 나라의 귀족자제들의 부끄러운 행태와 그것을 묵인하고 수용하는 사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다산은 이런 학문풍토와 교육풍토 때문에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훌륭한 인재가 나오지 않음을 깊이 탄식하였다. 당시의 학문풍토와 교육현실이 이러하니 다산은 발분망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812년에는 丁修七이 다산에게 와서 그의 맏아들을 교육하는 방법을 묻자, 다산은 敎穉說을 지어 정수칠에게 주었다. 이 글에는 평소 아동교육에 대한 다산의 소신과 자신이 설정한 아동교육 과정이 간명하게 정리되어 있다. 교치설 에 대한 내용은 이미 안대회 교수의 논문19) 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본고에서는 요점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다산은 이 글에서 『천자문』을 한때 장난삼아 지은 戱作에 불과한 책이라 비판하였고, 『사략』의 허황함을 비판하고 대신 『소학』을 읽어야 함을 주장하였으며, 『통감절요』를 비판하고 『국풍』과 『소아』, 『논어』, 『맹자』, 『대학』등을 읽히기를 권하며 교재를 수시로 바꾸어 아동들에게 신선감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항우나 유방의 고사를 읽는 것보다는 소동파․이태백․도연명 등의 시문을 읽는 것이 좋다고 하였고, 아동들에게 글씨를 쓰는 법도를 가르칠 때에는 중국의 古刻을 기본으로 할 것과, 아동들이 잡술과 참설․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 교치설 은 千文評, 史略評, 通鑑節要評,不可讀說등과 동일한 주장과 논리를 담고 있으면서 내용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다산은 1804년에 『아학편』을 편찬한 데 이어 1805년에는 아동들의 수신과 인성교육을 위해 『弟經』을 지었고, 1810년에는 아동들의 지식확충을 위해 『小學珠串』를 지었다. 그리고 이즈음 아동들의 바른언어사용을 돕기 위해 『竹欄物名攷』를 지었다. 1815년에는 『소학』주석서 가운데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어려운 부분을 밝혀 놓은 『小學枝言』을 지었고,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 간 후인 1819년에는 아동들의 바른 언어 구사를 돕기 위해 『雅言覺非』를 지었고, 『雅言指瑕』를 지었다. 이처럼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은 1801년에 시작되어 1819년까지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2)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이유와 목표

 그렇다면 다산이 당시의 아동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하고자한 이유와 목표는 무엇인가? 다산이 생존했던 시대에는 여전히 朱子學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기형적 학문풍토가 지속되고 있었다. 역사학계의 성대경 교수는 조선후기 학문풍토와 교육사상을 비판하며 “도덕․정신의 수양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교육사상은 주자학 이외의 모든 學派學問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제도․의학․법학․천문학․농학․수리학 등 실용의 학문과 경전에 대한 고증학, 심지어 문학․역사학까지도 한 단계 낮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발달이 크게 저해되었다. 학문은 오직 주자 성리학만 살아남아 그 독무대로 되어 극히 단조롭고 독단적인 권위적 학설만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교육 또한 무기력하고 허식적이며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20)  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풍토와 교육사상은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당시 일어났던 심각한 사회의 제반 문제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산이 아동교육의 여러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아동교육 개선을 통해 당시 학문풍토를 변혁시켜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였고, 그것을 통해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목표이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보기로 하겠다.

 다산은 五學論다섯 편을 지어 당시 유행하던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을 비판하여 잘못된 학문 풍토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오학론1 에서는 공리공담의 理氣說에 너무 치우쳐 있는 성리학을 비판하였고, 오학론2 에서는 경전의 字義와 訓讀에만 치중하는 훈고학적 경향을 비판하였다. 오학론3 에서는 가까이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멀리는 천지를 감동시켜, 귀신에게까지 이르는 문장의 본연의 기능을 잃고 美辭麗句에 치중하고 있는 문장학을 비판하였고, 오학론4 에서는 과거학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오학론5 에서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술수학에 대한 비판하였다. 다산은 본래의 정신을 잃은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을 비판하고, 사회적 병폐를 만들어내는 과거학, 술수학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비판에만 그치지 않고 그 대안으로 500권에 달하는 실질적이며 실용적인 저술을 지어 당시 학문의 쇠미한 경향을 바로잡고자 하였다.21) 

 다산은 俗儒論에서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文識과 武略등을 갖추는 데 대해 필요하지 않음이 없다. 어찌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글이나 짓고 벌레나 물고기 따위에 대한 주석이나 내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만 익히는 것이 학문이겠는가.”22)  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다산은 참된 선비의 학문이란 실제의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다산은 실학사상을 견지하고 현실개선을 강조하며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자신이 지은 저술을 통하여 참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풍토와 교육현실을 혁신하여 사회와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정의롭고 인정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였다.

 六經과 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고, 1表[경세유표]와 2書[목민심서와 흠흠 신서]로써 천하․국가를 다스리니, 本末을 갖춘 것이다.23) 

 다산이 회갑을 맞아 기록한 이 말에는 다산 평생의 지향과 목표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孔子가 子路에게 일러 준 유가의 정치적 이상인 ‘修己安人’과 ‘修己安百姓’이다.24)  즉 다산이 政敵에 의해 축출된 뒤에 유배지에서 천신만고의 노력을 기울여 이룩한 방대한 학문적 성과의 본령은 바로 ‘修己安百姓’이다. 그리고 ‘수기안백성’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다산은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 자식들과 천연두에 걸려 신음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麻科會通』을 지었는데, 그 책의 서문에 “내가 글을 읽고 도를 배우는 것은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함이다.25) "라고 한 范仲淹의 말을 인용하였다. 범중엄의 이 말은 곧 다산이 평생 지향한 것이었다. 다산은 그것을 위해서 보다 근본적인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아동교육 개선이었다.

 다산은 字說, 千文評, 史略評, 通鑑節要評, 敎穉說, 不可讀說등을 지어, 당시 아동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되었던 『千字文』,『史略』, 『通鑑節要』를 비판하여 잘못된 아동 교육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다산은 아동의 수신을 위해 『小學補箋』1권, 『弟經』1권, 『小學枝言』1권, 『編註廣孝論』등을 지었고, 바르고 흥미로운 문자교육을 위해 『爾雅述意』8권과 『兒學編』2권을 지었으며, 효과적인 지식 확충을 위하여 『小學珠串』3권을 지었고, 바른 언어교육을 위해 『竹欄物名攷』1권, 『雅言覺非』3권, 『雅言指瑕』1권을 지었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산은 국가경영의 모든 방책을 구비해 놓은 『經世遺表』에서 교육제도를 비중 있게 다루었고, 특히 아동교육분야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에 대해 안대회 교수는 다산 아동교육의 기본체계가 1817년에 완성된 『경세유표』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밝혔다. 그는 “국가전체의 설계안을 만들면서 다산은 교육제도 역시 비중 있게 다루었다. 교육제도 가운데 아동교육의 특수한 분야를 童蒙敎育의 이름으로 다루었는데 전체교육제도에 비추어 그 비중을 낮추어 보지 않았다.”고 하고『경세유표』에 기록된 구체적인 방안을 소개하였다.26) 

 아동 교육은 오로지 六書를 학습하는 것을 주된 학업으로 삼되 幼儀로서 보완한다. 『爾雅』․『說文』․『玉篇』․『急就篇』을 한 개 과정으로 하고, 曲禮․ 少儀․ 玉藻․ 內則및 朱子의 『小學』을 한 개 과정으로 하며, 『논어』․『맹자』․『중용』․『대학』을 한 개 과정으로 한다. 그 다음에 경서 한 가지를 講하게 해서 지식과 취향을 살펴보고, 글자 100자를 써보게 해서 육서의 학습을 살펴보며, 國風․小雅와 같은 四言詩를 지어보게 하거나 經義와 史論을 지어보게 해서 시험한다. 이때도 60자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글 짓는 재능을 살펴본다. 모든 과목을 나누어 가르치되 간략하게 함이 마땅하다.27) 

 이 기록은 다산이 1815년에 『小學枝言』에서 설계한 아동교육의 기본체계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다산은 사람이 처음 교육을 받을 때부터 바르고 효과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당시 이루어지고 있던 아동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검토한 다음 그 문제점을 찾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3. 조선후기 아동교육의 문제점 비판과 다산 아동교육 방법론의 특징

 본 장에서는 조선후기 아동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다산이 비판한 내용과 다산이 대안으로 제시한 저술을 인성교육․문자교육․지식확충․언어교육의 네 분야로 나누어, 다산 아동교육방법론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1) 文心을 키워주고 慧竇를 열어주는 교육방법(인성교육분야) 다산은 사략평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동을 가르치는 방법은 그 식견을 열어주는 데 있다. 식견이 미치는 것은 비록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모두가 文心慧竇의 열쇠가 되지만, 식견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비록 다섯 수레의 책을 기울여 만 권을 독파한다 해도 읽지 않은 것과 같다.28) 

 다산은 아동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동의 ‘文心’과 ‘慧竇’를 키워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문심’은 글의 담긴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혜두’는 지혜가 샘솟는 구멍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동을 가르칠 때는 무작정 많이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가르치는 내용이 아동의 식견으로 이해가 되어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문심’ 이 키워지고 ‘혜두’가 열리기 때문이다.

 다산은 아동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동의 ‘文心’과 ‘慧竇’를 키워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문심’은 글의 담긴 뜻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혜두’는 지혜가 샘솟는 구멍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동을 가르칠 때는 무작정 많이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가르치는 내용이 아동의 식견으로 이해가 되어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문심’이 키워지고 ‘혜두’가 열리기 때문이다.

 다산이 『사략』을 아동들이 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략』太古篇에 “천황씨는 木德으로써 왕이 되어 해를 攝提에서 일으키고 백성들은 자연히 교화되었는데, 형제 12인이 각각 1만 8천 세를 누렸다.”라는 것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처음부터 역사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고 하였다. 다산은 昭明太子蕭統이 5세에 五經을 읽은 것, 金時習이 5세에 『中庸』ㆍ『大學』을 읽은 등의 사례를 예로 들어, 고인들이 3세에서 5세 사이에 어려운 오경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들이 총명하여 일찍 깨친 것도 있지만, 결국 은 그들 자신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당시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법에 그선후의 차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평생의 독서가 이 『통감절요』한 질에 그치니, 그 여가에 비록 다른 글을 읽는다 하더라도 모두 범위가 너무 넓어 마음을 오로지하지 못하니 족히 독서로 칠 것도 못된다.29)  

 다산은 『통감절요평』에서 대개 아동 독서의 중요 기간을 『통감절요』로 대치함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다산이 『통감절요』를 비판한 한 이유는 첫째는 “삼국에 있어서 정통은 蜀漢에 주고 기사는 조조의 위나라를 위주로 하여 주객이 서로 바뀌고 王과 賊이 전도되어 의리에 타당치 못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타 年月의 착오와 사실의 와전은 이루헤아릴 수 없다”30) 는 것이다. 다산은 아동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기간을 8세부터 16세까지 9년으로 잡은 뒤, 이 가운데 아동이 몰두하여 글을 읽을 수 있는 기간을 3백 일로 한정하였다.31)  그런데 이 귀중한 시간에『詩經』·『書經』·『周易』·『禮記』·『春秋左傳』·『國語』·『漢書』·『史記』·『論語』·『孟子』·『莊子』·『離騷』와 같은 중요한 책은 읽지 않고, 오로지 『통감절요』15책을 읽고 있다고 탄식하였다.

 이에 다산은 『사략』과 『통감절요』를 대신하여 아동들이 읽어야 할 책을 저술하였다. 그것은 바로 『소학보전』, 『소학지언』, 『제경』, 편주 광효론 등과 같은 아동수신서이다. 이들 책에 대해서는 이미 정일균 교수에 의해 자세히 소개된 바 있으므로32)  재론하지 않겠다.

2) 觸類旁通의 교육방법과 字書를 통한 개별 字義교육방법(문자교육분야)

 ‘촉류방통’이란 말은 ‘비슷한 부류끼리 접촉하여 곁가지로 지식을 확장시킨다는 뜻이다. 다산은 당시의 아동문자교육의 문제점을 천문평과 자설 에서 제시하고, 교치설 과 불가독설 에서 再論하였다.

 먼저 천문평 에서는 『천자문』을 통한 아동 한자교육 방법이 바람직하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음을 강조하였다. 다산은 『천자문』이아동교재로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天地의 글자를 배우고 나면 日月ㆍ星辰ㆍ山川ㆍ丘陵등 그 족류를 다 알기도 전에 그것은 그만두고 五色을 배우라고 하며, 玄黃의 글자를 배우고 나면 靑赤ㆍ黑白ㆍ紅紫ㆍ緇綠의 그 다른 점을 분별하기도 전에 그것은 그만두고 宇宙를 배우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가르치는 법도인가?33) ”라고 비판하였다.

 글자가 생긴 것은 만물을 분류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그 모양으로, 혹은 그 이치로, 혹은 그 일로 하여 반드시 類를 미루어 널리 통하는 것이니, 그 족류를 다 알고 그 다른 점을 분별한 후에야 文心[글의 담긴 뜻을 이해하는능력]과 慧竇[지혜가 샘솟는 구멍]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小學에서 반드시 六書를 먼저 가르쳤다.34) 

 어리다고 용서하지 않고 모두 비슷한 부류끼리 접촉하여 곁가지로 지식을 확장시켜(觸類旁通), 그 족류를 다 알고 그 다른 점을 분별하여 문리를 깨치도록 해야 한다.35) 

 문자가 생긴 이유는 만물을 분류하기 위해서이므로, 문자를 익힐 때에도 반드시 의미가 비슷한 글자들을 같이 배워야 文心과 慧竇가 열린다. 그리고 이것은 비슷한 부류끼리 접촉하여 곁가지로 지식을 확장시키는 ‘觸類旁通’의 방법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산의 이러한 논지는 다산의 아동 문자 교육론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이에 다산은 1804년에 『천자문』을 대신할 아동문자학습교재 『兒學編』을 저술하였다. 『아학편』은 상권이 250구에 1000자, 하권이 250구에 1000자 도합 2,000자로 되어 있고 중복되는 글자는 없다. 단순한 암기 위주의 학습에서 벗어나 서로 관련 있는 글자를 ‘觸類旁通’의 방법으로 배움으로써 아동들이 이해하며 학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학편』상권 서두에 ‘天地父母, 君臣夫婦’라 하고 이어서 ‘兄弟男女, 姉妹娣嫂’ ‘祖宗子孫, 姪姑甥舅’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다산은 天地를 父母와 君臣을 夫婦와 병칭한 다음 가족과 친척의 호칭에 대한 글자들을 열거하여 아동들이 쉽게 익힐 수 있게 하였다.

 옛날에는 小學에서 오로지 字書만 익혀 글자마다 講究하여 象形과 會意와 諧聲의 까닭이 마음과 눈 사이에 명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글을 지어 편장을 만들 때 글자와 글자를 결합하여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때문에 문장이 서로 도습되지 아니하고, 참신하고 엄격하고 警發하여 『左氏傳』ㆍ『孟子』ㆍ『莊子』ㆍ屈原이 각기 한 체를 이루었다. 후세에는 字書를 익히지 아니하고 곧장 古文을 읽었기 때문에 마음과 눈에 있는 문자가 모두 두 자나 석 자 또는 넉 자씩, 많은 것은 수십 자에 이르도록 연속되어 있으며, 각 글자의 字義에는 모두 흐리멍덩하여 분명하지 못하다.36) 

 36)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字說, 217면. “古者小學, 專習字書, 字字講究象形會意諧聲之所以然, 無不暸然於心目, 方屬文而爲篇章也, 字字鳩合, 用適其宜,故其文不相蹈襲, 新嚴警發. 左孟莊屈, 各成一體. 後世不習字書, 直讀古文, 故文字之在心目者, 皆連二字三四字, 多至數十字, 而各字各義, 都囫圇不明.”

 다산은 字說에서도 문자 교육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다산은 아동들에게 한자를 가르칠 때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옛날에는 소학에서 『爾雅』, 『說文解字』, 『玉篇』과 같은 字書를 충실히 공부하여 글자 한 자 한자마다 그 뜻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 글을 지을 때 남의 것을 도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참신하고 엄정한 글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字書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의 정확한 뜻은 익히지 않고 곧장 고문을 읽었기 때문에 각 글자의 뜻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글을 지어도 남이 지은 글을 그대로 도습해서 쓸 수밖에 없고, 혹 인용한 부분 중에 글자의 뜻이 사정과 완전히 다른 것이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다.

 醫家에 약초가 있는 것은 문장가에 문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의술을 가졌던 사람은 약초의 뿌리 하나하나마다 약의 성질을 분별하여 그 병에 알맞게 사용하였는데, 후세에는 만들어진 처방을 가지고 전체의 병에 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의술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문장을 했던 사람은 글자 하나하나마다 뜻을 분별하여 사리에 맞게 문장을 구사하였는데, 후세에는 이루어진 글귀를 외어다가 그 전체를 표절하니, 이 때문에 문장이 예전만 못한 것입니다.37) 

 다산은 蒙學義彙序에서 의원이 약초 하나하나의 藥性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리기 어려운 것처럼, 학문을 하는 사람이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문장을 짓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어휘나 글귀 자체를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문장에 집어넣으니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앞서 인용한 자설 의 논의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다산은 자신이 주장한 문자 교육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아술의』8권을 찬술하였다. 이 책은 다산이 유배지인 장기에서 저술한 것으로『이아』와 운서 몇 종을 바탕으로 하여 긴요하게 사용되는 한자 6천5백여 자를 뽑되 의미에 따라 분류하고 그 글자에 간략한 풀이를 단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1801년 겨울에 도성의 옥중에서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3) 一以貫之를 위한 一以串之식 교육방법(지식확충분야)

 주지하는 바와 같이 ‘一以貫之’라는 말은 『論語』里仁편의 “吾道, 一以貫之”에서 나온 말로 ‘한 가지 이치로 모든 일을 꿰뚫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一以串之’라는 말은 ‘하나로 여러 가지를 꿰다’라는 뜻이다. 다산은 아동들이 학문에 있어 장차 一以貫之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一以串之하여 지식을 확충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구현하기 위해 1811년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소학주천』3권을 지었다.

 다산이 이 책을 지은 이유는 小學珠串序에 잘 나타나 있거니와, 그 요지는 瑟瑟珠몇 천 개를 얻었더라도 구슬을 색깔별로 분류하여 좋은 명주실로 꿰어 튼튼한 상자에 보관하지 않으면 끝내 다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38) .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지금 학문하는 법도 이와 같다. 무릇 九經과 九流百家의 서적에 있어 그 名物數目이 모두 슬슬주이다. 꿰미로 꿰는 것을 본받지 않으면 또한 얻는대로 곧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내가 귀양살이하면서 일이 없을 적에 동자 몇이 나에게서 수업을 받았는데, 기억을 잘 하지 못함을 근심하였다. 나는 늙은 장사꾼처럼 슬슬주의 이야기를 하여 그들을 일깨워 주었다. 이에 古經이래 여러 서적의 명물수목을 수집하고 그 중에 實學에 도움이 되는 것을 뽑아서 모두 3백 조목을 얻었는데, 이를 『소학주천』이라 이름 붙여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한 아동이 매우 기뻐하면서, “선생의 글은 근본이 있습니다. 孔子가 子貢에게 이르기를 ‘賜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가? 아니다. 나는 하나로 만사를 관통한 것이다.’하였으니, 선생님의 책은 근본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39) 

 다산은 이 글에서 제시한 효과적인 학습 방법은, 수천 개의 보배로운 구슬을 색깔별로 꿰미를 만들어 상자에 보관하듯이, 九經과 九流百家 의 서적에 있는 수많은 名物數目을 유사한 것 끼리 모아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책을 편찬한 것이 바로 『소학주천』이다. 글의 말미에서 다산은 이 책을 본 어린 제자의 반응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이 책을 ‘一以貫之’라는 말로 평가하며 선생님의 책에는 근본이 있다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소학주천』에 대해서는 아직 논문이 발표된 바 없기에 본장에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어린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을 九經과 九流百家등의 전적에서 뽑아서 ‘一之類’에서부터 ‘十一十三至二十八’까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一, 二, 三,四등 하나의 글자마다 적게는 10條, 많게는 60조에 이르는 조목들을 제시하였는데, 조목마다 그 단어의 개념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출전을 기재하였다. 예를 들면 ‘一之類’는 모두 10개의 조목이 있는데, ‘一人’, ‘一食’, ‘一就’, ‘一相’, ‘一軍’, ‘一命’, ‘一廟’, ‘一獻’, ‘一鼎’, ‘一章’이 그것이다. 그리고 ‘一人’에 대해서는 “一人者, 天子也. 君臨四海, 至尊無對, 此之謂一人也.”라는 설명을 붙이고, 그 왼쪽에는 이 말의 출전에 대해 “一人之名, 出周書”라고 기재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一’자에서부터 ‘十’자까지 열 글자, ‘十一’ ‘十三’ ‘二十八’자 3개 글자 도합 13개 글자를 세우고 그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 300조를 3권에 담았다.

 다산이 『소학주천』에 사용한 분류방식은 하나의 글자로 여러 가지 용어를 꿰어 놓은 ‘一以串之’의 방식이며, 앞서 설명한 ‘비슷한 부류끼리 접촉하여 곁가지로 지식을 확장시키는 ‘촉류방통’의 방식과는 다른것이다. 그리고 ‘一之類’의 ‘一人’, ‘一食’, ‘一就’, ‘一相’, ‘一軍’, ‘一命’,‘一廟’, ‘一獻’, ‘一鼎’, ‘一章’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즉 ‘一人’,‘一食’, ‘一就’는 천자에 관한 것이고, ‘一相’, ‘一軍’, ‘一命’은 제후에 관한 것이며, ‘一廟’, ‘一獻’, ‘一鼎’, ‘一章’은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산이 ‘一以串之’의 교육방법을 통해 아동들이 장차 ‘一以貫之’할 수 있기를 도모했다고 이를 수 있다.

 『소학주천』은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문자를 편집하신 것이 있다 하던데, 한 집안에서 따로 두 개의 門戶를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쪽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 文例가 비록 쓸데없이 긴 듯하나 어린아이들에게 외도록 하려면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방법은 10단위로 한도를 삼았기 때문에 혹 구차스럽게 채운 것도 있고 혹 억울하게 빼놓은 것 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세상에서 통행되는 문자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행해지지 않습니다.40) 

 다산은 1811년 겨울에 정약전에게 보낸 위 편지에서 『소학주천』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였다. 즉 『소학주천』은 아동들을 위해 지은 것이라는 것과 정약전이 지은 『몽학의휘』를 의식하며 한 집안에 두 개의 문호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며 자신이 지은 『소학주천』을 아동교육 사용하자고 하였다. 이는 아마도 정약전의 『몽학의휘』가 다산의『이아술의』를 기반으로 하여 간략하게 정리한 것인데 반해 『소학주천』은 그 범위가 꽤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소학주천』에 대한 다산의 자부심이 컸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4) 改非矯俗식 교육방법(언어교육분야)

 ‘改非矯俗’은 직역을 하면 ‘잘못된 것을 고쳐 세속을 바로잡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언어교육에 있어 ‘잘못 쓰는 있는 말을 바로 잡아 세속의 언어 습관을 바로잡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자 한다. ‘改非 矯俗’이라는 말은 다산의 시 작은 병풍에 그린 정석치의 용 그림에 제하다(題鄭石癡畫龍小障子) 의 마지막 두 구절 “戒我勿洩我發之, 丹靑小數要矯俗.”에서 원용한 것이다. 다산은 시의 전반부에서 요즘 화가들이 제멋대로 그리는 용 그림을 비판한 다음, 정석치가 그린 용 그림을 극찬하였다. 말미에서는 “나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했는데도 내가 발설하는 것은, 그림 몇 점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싶어서라네.(戒我勿洩 我發之, 丹靑小數要矯俗.)”라고 읊어 당시 화가들의 잘못된 화풍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다산의 이러한 정신은 학문, 문학, 사상에 투영되어 있고, 더 나아가 다산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論語古今註』와 같은 수많은 경전 주석서가 그렇고, 哀絶陽과 같은 여러 편의 社會詩나 豺狼과 같은 여러 편의 諷刺詩가 그러하며, 五學論이나 還上論과 같은 수많은 문장이 그러하다.

 다산은 아동교육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아동의 인격수양, 문자학습, 지식확충을 위해 편찬한 저술들이 모두 그러했다. 그리고 아동의 바른 언어구사와 적절한 어휘사용을 위해 만든 『죽란물명고』, 『아언각비』, 『아언지하』등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산은 당시 사람들이 잘못된 언어를 구사하고 적절치 못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관행을 고치기 위해서는 아동교육에서 언어 습관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연령층의 잘못된 언어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이 책들을 지었다. 특히 다산이 1819년에 지은 『아언각비』3권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민간에서 평상시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잘못 쓰고 있는 말을 찾아, 그 말의 정확한 어원을 풀이하여 잘못된 점을 바로잡은 책이다. 다산은 아언각비서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배움이라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잘못된 점을 깨닫는 것이다. 잘못된 점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늘 쓰는 말에서 깨달을 뿐이다.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쥐를 가리켜 옥덩이[璞]라고 말하였다가 이윽고 이를 깨닫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쥐이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다.’ 하고, 또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말하였다가 이윽고 이를 깨닫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슴이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미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나서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고쳐야만 이것을 배움이라 하는 것이다.41) 

 다산의 이 발언은 참된 배움이라는 것이 결국은 바른 말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산의 이러한 주장은 字說에서 글자 한 자 한 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다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장 기본이 되는 말과 글자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후에 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언지하』도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평소에 쓰는 말 중에 잘못 쓰이고 있는 말을 찾아 지적하고 자세하게 설명한 책으로, 모두 26條로 되어 있다. 또한 다산은 『죽란물명고』42) 를 지어 사물의 명칭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을 종류별로 모아서 먼저 한자명을 쓰고 한글로 풀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野草類에는 ‘胡瓜외’ ‘寒瓜슈박’ 등과 같은 300개의 용어가 18개의 부류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같은 종류끼리 모아 두어서 효과적인 학습이 가능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4. 맺음말: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의의

 지금까지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의 총체적인 면모를 살펴보았다. 맺음말에서는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이 지니는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은 기존에 이루어지던 아동교육의 맹점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임형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천자문』과 『사략』․『통감』은 내용도 썩 좋지 않으며, 더욱이 교재로 쓰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종래 허다히 받아왔다. 다산의 문제제기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다산의 교육평론 3편에 관류하는 요점이 있는바 ‘문심혜두’라는 4글자다. 이는 ‘문심의 슬기 구멍’, 즉 글을 짓는 마음의 창조적 원천, 다시 말하면 ‘인문창조의 샘’을 뜻하는 말이다.43) ” 이 말 속에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의의로 간주할 수 있는 대목이 있거니와, 그것은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文心을 키워주고 慧竇를 열어주는 교육방법, 觸類旁通의 교육방법과 字書를 통한 개별 字義교육방법, 一以貫之를 위한 一以串之식 교육방법, 잘못 쓰는 있는 말을 바로잡아 세속의 언어 습관을 바로잡는 ‘改非矯俗’식 교육방법이다. 다산이 이와 같이 획기적인 교육방법을 도입하여, 다채롭고 풍부하며 효과적인 아동교육교재를 만들었다는 점은, 다산 아동교육 개선의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이 가지는 또 다른 의의는 이 사업이 가지는 지향과 목표에 있다. 다산의 목표는 원대하였다. 사업의 일차적인 목표는 참된 인성과 탄탄한 지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었고, 더 나아가 학교제도의 정비 방안과 과거제도 개혁, 교육현실과 학문경향을 혁신방안 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의 기강을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다산의 아동교육 개선은 자신이 세운 經世濟民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토대이고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 정순우(1990); 김태오(1993), 59~80면; 심현지(1997), 160~171면; 정재영(2002);홍신기(2009), 67~85면. 정일균(2012), 181~221면. 등
2) 정일균(2005), 203~248면; 정일균(2012), 181~221면.
3) 임형택(2011), 7~34면; 정민(2011), 117~163면. 
4) 안대회(2011), 81~116면.
5) 정승혜(2013), 227~244면.
6) 丁若鏞, 與猶堂全書, 韓國文集叢刊281권, 跋小學補箋, 310면. “右小學補箋一編, 余所作也. 辛酉孟春, 兒曹讀小學, 將以應講也. 先儒注小學者非一家, 然其箋釋尙有未備, 余述舊聞以補之, 書未完而禍作. 於獄中又得名義數條, 將歸而足之. 先記其時月, 寄兒錄其尾, 以示余漠然不省其圖, 已而孳孳經籍之間, 爲迂且頑, 足用爲子孫戒.” *이하 與猶堂全書는 全書로 韓國文集叢刊는 韓叢로 약칭한다.
7) 다산은 1799년에 곡산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5월 5일에 형조참의에 제수되어 옥사의 일체를 처결하는 권한을 위임 받았다. 이는 다산을 크게 쓰고자 한 국왕 정조의 결단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老論僻派집권당인들은 6월 22일에 사간원 헌납 閔命赫을 시켜 다산을 탄핵하게 한 다음 며칠 후에 다산을 파직시켰다. 다산은 이듬해인 1800년 4월 7일에 자신을 시기하여 참소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고향으로 돌아가 정적들의 칼날을 피하고자하였다. 金奉楠(2007), 101~132면 참조.
8) 다산이 신유옥사 때 옥에 갇히게 된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승하하고, 11월 18일에 卒哭祭가 끝나자, 노론벽파는 貞純王后를 등에 업고 攻西派와 공조하여 茶山一派를 비롯한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집권 당인들은 그들과 뜻을 달리하여 정조를 도와 나라를 혁신하려 했던 南人時派들을 10여 년 동안이나 음해하다가, 정조가 승하한 직후인 1801년 봄에 마침내 “凡看西書一字者, 有死無生.”이라는 구호를 걸고 辛酉獄事를 일으켰다. 이때 화를 당한 남인 명사들은 거의 대부분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다산은 1801년 2월 9일 새벽에 체포되어 丁若銓․丁若鍾․李家煥․李基讓․權哲身․吳錫忠․洪樂敏․李承薰․金健淳․金伯淳․崔昌顯․洪敎萬등과 함께 옥에 갇혔는데, 洪羲運과 李基慶등 공서파들은 다산을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다산은 누명을 벗을 만한 증거가 많아서 형틀을 벗고 禁府안에 保放되었고 여러 대신들이 白放할 것을 의논하였지만, 오직 徐龍輔가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결국 2월 27일 밤에 경상도 長鬐縣으로 정배되었다. 金奉楠(2007), 101~132면 참조.
9) 다산이 1804년에 지은 蒙學義彙의 서문에는 爾雅述意8권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다산이 1822년에 회갑을 맞이하여 지은 자찬묘지명 에는 이아술 6권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명칭과 권수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아술의와 이아술는 같은책이다.
10)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字說, 217면. “古者小學, 專習字書, 字字講究象形會意諧聲之所以然, 無不暸然於心目, 方屬文而爲篇章也, 字字鳩合, 用適其宜, 故其文不相蹈襲, 新嚴警發. 左孟莊屈, 各成一體. 後世不習字書, 直讀古文, 故文字之在心目者, 皆連二字三四字, 多至數十字, 而各字各義, 都囫圇不明.”
11)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蒙學義彙序, 285면. “厥明年春禍作, 茯菴謫端川, 余謫長鬐. 念先輩之許與, 悼前言之無從, 於是, 取爾雅韻書等數帙, 選取其要於用者六千五百餘字, 以義分門, 約略疏釋, 編之, 凡八卷, 名之曰爾雅述意. 欲推其例而衍之,益加綜核, 以成一家之訓. 其年冬, 又被逮至京師, 轉而適康津, 書沒於獄, 不可得. 會聞茯菴之訃, 遂不復爲意. 甲子冬, 余兄天全, 自黑山海中投余書一卷, 視其題曰蒙學義彙. 察其凡, 乃余長鬐之舊, 而簡其取略其注者也. 嗟呼! 茯菴旣逝, 誰與同好, 若其義例門目, 余兄之述備矣, 不復贅.”
12)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上中氏.辛未冬, 437면. “先生所著蒙學義彙,豈不精嚴, 而我所輯兒學編二卷, 限之以二千字, 其上卷有形之物也, 其下卷物情事情也, 每八字一韻, 如千文之例, 未知如何. 二千字旣讀之後, 直授國風, 亦自能通. 其不才者, 雖先讀萬字, 亦無益矣.”
13)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沙村書室記, 286면 “天之布民於諸島, 猶蠶婦之布蠶於諸箔也. 吾人以島爲箔, 其大者爲赤縣․大夏, 其小者爲日本爲流求, 甚者爲楸子․黑山․紅衣可佳之屬. 過而視之者, 其豔大而哂小也如箔. 然苟有博學君子, 多蓄古典籍, 敎之以法, 及其離經辨志, 敬業樂羣, 因之爲聖爲賢, 爲文章爲經世之學.小島之民, 無以異乎大島之民也.”
14) 이에 대해 안대회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당시 여건을 볼 때 다산이 주장한 내용은 파격적이다. 모든 교육 조건에서 흑산도와 같은 섬 지역은 열악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좋은 스승을 데려다가 좋은 교육법을 통해 배운다면 여건이 좋은 지역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전통시대 외진 지역의 아동교육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산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점에서 다산의 형제는 비슷한 생각과 방법을 구사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지역과 신분, 아동의 학습역량 차이를 인정은 하되 질 좋은 교육을 베풀어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자의 태도가 극복의 열쇠라고 보았다. 교육자는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꿈을 불어넣어 주고 잘 인도하려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산은 지역과 신분, 능력 차이를 극복하여 아동을 훌륭하게 성장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라고 하였다. 안대회(2011), 86~87면 참조.
15) 다산은 1801년 11월 중순에 강진현에 이배되어, 강진 동문 밖에 위치한 어느 노파의 주막집에 방을 하나 얻어 ‘四宜齋’라 이름 붙이고 4년여를 기거하였다. 그러다가 1805년 겨울에 혜장선사의 도움으로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1808년 봄까지 2년여를 살았고, 1808년 봄에는 윤단의 배려로 다산초당에 정착하였다.
16) 다산의 강진유배기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임형택(2000), 399~434면과 정민(2011),117~163면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17) 다산의 교학방식에 대해서 정민 교수는 다산의 교학방식을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교육으로 분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 정민(2011), 125~130면 참조.
18)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上仲氏. 辛未冬, 437면. “至於貴族子弟, 皆帶衰氣, 都是下劣. 精神則掩卷輒忘, 志趣則安於下流. 如詩書易禮中微言妙論, 時一言之, 勸其向學, 則其形如縛足之雉, 勸啄不啄, 抑首就粒, 咮與粒相觸, 而終不啄之者.噫! 且奈何. 不惟此數縣爲然, 一道皆然. 近日京華貴游子弟, 皆以魚鳥獐兎, 把作六經, 而進士二百, 鸎衫每過五十, 及第亦然, 世復有文學哉. 大抵人才眇然, 其或斗筲之才, 稍知記名者, 皆下賤也. 士大夫, 今當末運, 非人力可及.”
19) 안대회(2011), 81~116면 참조
20) 성대경(1993), 59~79면 참조.
21) 다산이 조선후기의 학문풍토와 교육현실을 혁신하기 위해 대안으로 제시한 저술500권을 분야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2)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俗儒論, 253면. “眞儒之學, 本欲治國安民, 攘夷狄裕財用, 能文能武, 無所不當. 豈尋章摘句注蟲釋魚, 衣縫掖習拜揖而已哉.”
23)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自撰墓誌銘集中本, 339면. “六經四書, 以之修己, 一表二書, 以之爲天下國家, 所以備本末也.”
24) 『論語』, 憲問“子路問君子, 子曰修己以敬.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人. 曰如斯而已乎? 曰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25)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麻科會通序, 279면. “昔范文正有言曰, ‘吾讀書學道, 要以活天下之命.’”
26) 안대회(2011), 81~116면 참조.
27) 丁若鏞, 『全書』, 『韓叢』285권, 『經世遺表』, 261면. “童子之學, 專以六書之學爲主業, 而輔之以幼儀. 『�爾雅』․『說文』․『玉篇』․『急就篇』爲一科, 曲禮․少儀․玉藻․內則及朱子『小學』爲一科, 『論語』․『孟子』․『中庸』․『大學』爲一科於是試講一經, 以考其識趣, 試書百字, 以考其六書之學, 試製四言如國風小雅, 或爲經義史論, 無過六十字, 以考其屬文之才總宜分授, 以簡諒爲務”
28)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史略評, 481면. “牖蒙之法, 在乎啓發其知識. 知識之所及, 卽一字一句, 皆足以爲文心慧竇之鑰, 知識之所不及, 雖傾五車而破萬卷, 猶無讀也.”
29)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通鑑節要評』, 482면. “卽平生讀書, 止此一帙, 其餘, 雖讀他書, 皆汗漫不能專, 不足數也.”
30)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通鑑節要評』, 482면. “其在三國正統予蜀漢,記事主曹魏, 主客互換, 王賊倒置, 於義無所當. 著書如此, 尙可以傳之後乎? 其他年月之訛舛, 事實之乖繆, 指不勝僂.”
31) 다산은 『通鑑節要評』에서 “8세부터 11세까지는 철이 들지 않아 글을 읽어도 그의미를 모르며, 15~16세에는 이미 음양과 기호(嗜好)가 있어 모든 물욕에 마음이 갈리게 되니, 실상은 12~14세의 3년간이 독서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3년 중에도 여름은 몹시 덥고 봄과 가을은 가일(佳日)이 많아 어린아이들이 놀기를 좋아함으로써 모두 글을 읽을 수 없으며, 오직 9월서부터 이듬해 2월까지 1백 80일 이 글을 읽는 날짜가 된다. 이 3년을 통계하면 5백 40일이 되는데, 거기에 또 세시(歲時)의 놀이와 질병과 우환의 날짜를 제하면 실제로 글을 읽는 기간은 대략 3백일 쯤 된다.”고 하였다.
32) 정일균(2005), 203~248면 참조.
33)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千文評, 481면. “我邦之人, 得所謂周興嗣千文, 以授童幼, 而千文非小學家流也. 學天地字, 乃日月星辰山川丘陵, 未竭其族, 而遽舍之曰, 姑舍汝所學, 而學五色學玄黃字, 乃靑赤黑白紅紫緇綠, 未別其異, 而遽舍之曰, 姑舍汝所學, 而學宇宙, 斯何法也.”
34) 위와 같은 책. “文字之興, 所以類萬物也. 或以其形, 或以其情, 或以其事, 必觸類而旁通之, 竭其族別其異而後, 其情理粲然, 而文心慧竇. 於是乎開發. 故古者小學, 必先之以六書之敎.”
35) 위와 같은 책. “不以幼小而恕之, 皆所以觸類旁通, 竭其族別其異, 以啓其文心慧竇也.”
36)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字說, 217면. “古者小學, 專習字書, 字字講究象形會意諧聲之所以然, 無不暸然於心目, 方屬文而爲篇章也, 字字鳩合, 用適其宜,故其文不相蹈襲, 新嚴警發. 左孟莊屈, 各成一體. 後世不習字書, 直讀古文, 故文字之在心目者, 皆連二字三四字, 多至數十字, 而各字各義, 都囫圇不明.”
37)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蒙學義彙序, 285면. “醫家之有藥草, 猶文家之有文字. 古之爲醫者, 根根而辨其性則用中其病, 後世, 執成方而投其全, 醫之術以汚. 古之爲文者, 字字而辨其旨則使中其理, 後世, 誦成句而勡其全, 文莫猶古也.”
38)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小學珠串序, 540면. “蜀之童, 得瑟瑟之珠數 千, 見而悅之, 或懷之, 或襭之, 或含之以口, 或握之以手, 東適洛, 以求其售. 旣行, 勞而披則懷者落, 涉而俯則襭者迸, 見可喜而笑, 可言而言則含者出, 猝遇蜂蠆虺蜴害身之物, 欲有以衛其患則握者釋, 未至半而瑟瑟盡矣. 悵然而反, 以告其老賈, 賈曰, 嗟乎惜哉! 盍蚤來? 夫致瑟瑟有法, 園客之絲以爲線, 幺豱之毛以爲箴, 碧者串之爲碧串, 赤者串之爲赤串, 紺玄紫黃, 色色而串之, 吳犀之革, 櫝而藏之, 此致瑟瑟之法也. 今子雖得瑟瑟萬斛, 無串以串之, 何適不失.”
 39) 위와 같은 책. “今夫學問之法猶是也. 凡九經九流百家之書, 其名物數目, 皆瑟瑟也.不肖串以串之, 無亦隨得而隨失乎. 謫居無事, 有童子數人, 從而問業, 患不能強志.余老賈也, 談瑟瑟珠以喩之. 於是, 蒐輯古經以來名物數目, 選其有補於實學者, 共得三百條, 名之曰小學珠串, 以予之. 有一童子躍然喜曰, 先生之書有本矣. 昔者, 孔子謂子貢曰, 賜, 爾以吾爲多學而識之者與? 非也. 予一以貫之者也. 先生之書有本矣.”
40)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上中氏. 辛未冬, 437면. “小學珠串, 爲兒輩作也. 聞來人言, 先生亦有所輯, 此等文字, 不必一家之內, 各立二門. 以此行用, 未知如何. 其文例雖若宂長, 使小兒輩誦讀, 不得不如是也, 又其法以什爲度, 故或有苟充者,或有冤屈者. 然世俗通行之文字, 不如是不行.”
41) 丁若鏞, 『全書』, 『韓叢』281권, 雅言覺非序, 269면. “學者何? 學也者, 覺也.覺者何? 覺也者, 覺其非也. 覺其非奈何? 于雅言覺之爾. 言之而喚鼠爲璞, 俄而覺之曰是鼠耳. 吾妄耳. 言之而指鹿爲馬, 俄而覺之曰是鹿耳. 吾妄耳. 旣覺而愧焉悔焉改焉, 斯之爲學.”
42) 정승혜 교수는 �『竹欄物名攷』와 『靑館物名考』의 편자를 논의하며 다산이 편찬한 『죽란물명고』를 아들 정학연이 보완한 것이 『청관물명고』라고 하였다. 그는 “실제로 『죽란물명고』와 『청관물명고』는 기존에 국어학계에서 알려진 바와 달리, 항목이나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즉 『청관물명고』는 『죽란물명고』의 18류에 4류를 덧붙여 22류가 되었으며, 기왕에 다산이 정리한 『죽란물명고』의 내용에 첨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다. 정승혜(2013), 232~233면 참조.
43) 임형택(2011), 20~23면 참조.

ksec_33-0_227_t4.jpg53.9KB

Reference

1.정순우(1990),茶山『兒學編』硏究,『丁若鏞』,서울(한국),고려대학교 출판부.
2.정재영(2002),『茶山정약용의 『兒學編』』,서울(한국),태학사.
3.정민(2006),『다산선생 지식경영법』,서울(한국),김영사.
4.성대경(1993),茶山의 敎育改革論,『대동문화연구』제28집,서울(한국),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
5.김태오(1993), 다산의 『아학편』에 반영된 문자교육관 , 『교육철학』제11 집, 서울(한국)." "
6.심현지(1997),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 『겨레얼』3권, 서울(한국), 겨레 얼찾아가꾸기모임." "
7.김재섭(1999),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연구 ,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인천 (한국), 인하대학교" "
8.임형택(2000) 정약용의 강진유배기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 , 『실사구시의 한국 학』, 서울(한국), 창작과 비평사." "
9.정일균(2005), 다산 정약용의 ‘소학론’(Ⅰ) - 소학지언을 중심으로 , 『다산학』 6호, 서울(한국), 다산학술문화재단." "
10.金奉楠(2007), 다산 시에 나타난 내면의식의 변모양상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서울(한국), 고려대학교." "
11.이광호(2009), 정몽유어․아학편․천자문의 분포적 특성 , 『언어과학연구』 48권, 서울(한국), 언어과학회." "
12.홍신기(2009), 아학편에 나타난 아동을 위한 문자교육관과 아동용문자교육 교재 로서의 시사점 탐색 , 『한국교육논단』8권, 서울(한국), 한국교육포럼." "
13.임형택(2011), 전통적인 인문 개념과 정약용의 공부법 『다산학』18호, 서울 (한국), 다산학술문화재단." "
14.정민(2011),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학방식 『다산학』18호, 서울(한국), 다산학술문화재단."
15.안대회(2011), 다산 정약용의 아동교육론 , 『다산학』18호, 서울(한국), 다산학술문화재단. "
16.정일균(2012), 다산 정약용의 ‘소학小學’론(Ⅱ) - 『아학편兒學編』을 중심으 로 『다산학』20호, 서울(한국), 다산학술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