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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363(Print)
ISSN : 2465-8138(Online)
Han-Character and Classical written language Education No.48 pp.41-68
DOI : https://doi.org/10.15670/HACE.2020.48.3.41

Accepting Yeogeoyuhae and Chinese Vocabulary Recognition by Intellectuals in the Late Joseon

Kim Hara
* Assistant professor, Jeonju University
2020년 3월 30일 2020년 5월 08일 2020년 5월 21일

Abstract

The Chinese lexicon Yeogeoyuhae was published in Joseon in 1682 to help the middle class interpreters learn foreign languages. However, the lexicon was often cited among intellectuals of high birth who were not major users. This article examines these unexpected phenomena and attempts to approach the uncommon readers' attitude toward their native language in terms of social linguistics.
Kwon Man set his goal to master ancient Chinese vocals and to write proper Chinese poetry. For him, the predicament of being an intellectual of the frontier is an important motivation. He obtained and read Chinese study books, such as Yeogeoyuhae and Nogeoldae, but the result of reproducing the language reality of the day did not satisfy him. In his composition, Chinese is divided into authentic Chinese and ethnic minority language of China, and Yeogeoyuhae is considered to be in the latter domain. He returned to the Chinese language of the past and sought to find the right sound, the standard sound commonly used in East Asian culture.
Yi Ik read and quoted Yeogeoyuhae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than Kwon Man. He extracted the name of the crop called corn from the lexicon to describe and name the characteristics of certain plants grown in the land of Joseon. If only Kwon searched the dictionary to check the pronunciation of Chinese words, he paid attention to the instructions of the vocabulary. An Jeongbok, one of his pupil, succeeded the teacher's view and searched the Chinese vocabulary called ‘饅頭’ [mán‧tou] in the lexicon and confirmed that it corresponded to the Korean food called Sanghwa.
The objects that Jeong Yak-yong and Kim Mae-sun were mainly interested in were not the native languages of Joseon written in Korean, but a number of Chinese characters and Chinese characters used in Joseon. The question of whether these vocabulary roots in the Chinese classics were used correctly and without any deviation from the original was very important to them. In their composition, authentic Chinese and Chinese characters in Korea become difficult to escape from the hierarchical order.
The linguistic composition shared by Yi Deok-mu and Yi Kyu-kyeong is clearly distinct from that of Jeong Yak-yong and Kim Mae-sun. With a neutral gaze, Yi Deok-mu reviewed the languages of East Asian countries and created a system of knowledge of his native language. He did not work to give hierarchy between the languages of each country or to restore the so-called order of language. Yi Kyu-kyeong not only succeeded in his grandfather's linguistic composition, but also gained a broader perspective in that he was a concrete consciouser of his native language. This is confirmed by a detailed list of native plant names he actively collects and presents.

조선후기 지식인의 《譯語類解》 수용과 한자 어휘 인식

김하라
*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조교수

초록

漢語 어휘집 《譯語類解》는 중인층인 역관의 외국어 학습을 돕는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1682 년에 간행됐다. 그런데 이 책은 주된 사용층이 아닌 조선후기의 사대부 지식인 사이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의외의 현상을 類別하고 각각의 사대부 독자가 지닌 자국어에 대한 태도를 사회언어학의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權萬은 변방의 지식인이라는 조건에 기인한 문화적 소외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중화의 음률을 터득하고 제대로 된 한시를 쓰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설정했다. 그 과정에서 권만은 《역어유해》와 《노걸대》 등의 중국어 학습서를 접했으나, 이처럼 당대의 漢語 현실을 재현한 결과물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권만의 구도 안에서 한어는 중화의 언어와 오랑캐의 변종적 언어라는 위계로 나뉘며, 그가 참조한 《역어유해》는 후자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간주됐다. 그는 16세기 초에 간행된 《사성통 해》로 회귀하여 正音, 즉 동아시아 문화권에 통용되는 표준음을 찾고자 했다.
李瀷의 인용법은 그가 권만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역어유해》를 접했음을 보여준다. 이익은 조선 땅에서 재배되는 특정한 식물의 구체적 특성을 기술하고 이름을 밝히기 위해 ‘玉薥薥’(옥수수) 과 같은 작물의 이름을 《역어유해》로부터 추출했다. 권만이 漢語의 발음기호를 확인하기 위해 《역 어유해》라는 사전을 검색했다면, 이익은 해당 어휘의 지시 내용에 주목했다. 安鼎福은 스승의 시각을 계승하여 《역어유해》에서 ‘饅頭’라는 한어 어휘를 검색하고 그것이 ‘상화’라는 조선 음식에 상응함을 확인했다.
丁若鏞과 金邁淳에게 주된 관심의 대상은 조선의 고유어 어휘가 아니라 자국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한자어들이다. 중국 고전 한문에 뿌리를 둔 이 어휘들이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의대로 정확히 사용되고 있는지의 문제가 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 이 구도 안에서 중국의 한자어와 조선의 한자어는 상하의 위계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李德懋와 李圭景이 공유한 언어학적 구도는, 정약용이나 김매순의 그것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덕 무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를 검토하며 자국어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나 갔고, 각국의 언어 사이에 위계를 부여하거나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이규경 은 조부의 언어학적 구도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자국어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이라는 점에서 보다 확장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던바, 이는 그가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제시하고 있는 고유어 物名의 상세한 목록을 통해 확인된다.

Ⅰ. 《譯語類解》의 편찬과 수용에 관련된 두 계층

 

《譯語類解》는 漢語 역관의 회화 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마련된 어휘집이다.1) 이 책은 사역원에 소속된 한어 역관 金指南(1654~1718)이 실무를 전담해 1682년에 간행된 이래, 그의 가업을 계승한 손자 金弘喆(1715~1778)이 보유편 《譯語類解補》를 1775년에 편찬하며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중인인 역관 계층 내부의 실무적 노력으로 간행된 《역어유해》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한어 전공의 雜科에서 주요 수험서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유명한 갑부 역관 卞承業(1623∼1709)의 8대손이자 한어 역관인 卞殷榮(1844~?)은, 1864년의 잡과에 응시하기에 앞서 《역어유해》를 교재로 삼아 공부하며 수록된 어휘의 발음을 책 상단 여백에 한글로 적어 암기하고, 뒤표지 안쪽의 공란에 제 이름 석 자와 ‘壯元郎’ 등의 글씨를 반복적으로 표시한 낙서로 수석합격을 향한 희망을 드러내기도 했다.2)

그런데 이 책에 손때를 묻힌 이들은 변은영과 같이 중인층에 속한 譯科 수험생만은 아니었다. 물론 보유편까지 포함한 《역어유해》의 완간이 역관인 김지남 三代의 손에서 이루어진 이후 같은 계층의 잡과 응시생들이 가장 절실한 독자가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책이 동아시아 국가간의 외교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 최상층의 관료들이 적절한 시점에 사안을 발의하며 역관들의 작업을 지지하고 추인해 주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어유해》의 편찬에는 중인과 사대부 두 계층이 함께 얽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3)

그리고 이 책이 공간된 이후의 독자층 역시 앞서의 두 계층을 포괄하고 있어 흥미롭다. 일례로 서울에 거주하던 27세의 士人 兪晩柱(1755~1788)는 1781년 7월 《역어유해》 하권을 저본으로 삼은 어휘 목록인 〈俗語名物解〉를 스스로 엮어 자신의 일기 《欽英》에 기재해 두었는데, 그 구성과 표기법을 통해 18세기 조선 사대부 지식인의 한자 및 자국어 어휘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4) 논의 범위를 확장하여 《역어유해》가 출간된 이후 저술된 조선 후기 한문 문헌을 검토해 보면, 유만주를 포함한 식자층에서 이 책을 인용한 예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즉 李瀷(1681~1763), 權萬(1688~1749), 安鼎福(1712∼1791), 李德懋(1741∼1793), 丁若鏞(1762∼1836), 金邁淳(1776∼1840), 李圭景(1788∼1856) 등 한문을 文語로 사용한 사대부 지식인들, 다시 말해 역과에 응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 《역어유해》를 읽고 그 흔적을 저술에 남겼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에 속하는 이들이 《역어유해》의 이분된 독자층 중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여, 각각의 사대부 독자가 지닌 자국어에 대한 태도를 類別하고 사회언어학의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1) 연규동(1995). pp293~316.
2) 김하라(2017a). pp113~162. 
3) 김하라(2017a). pp113~162.
4) 김하라(2017b)

 

Ⅱ. 조선후기 지식인의 《역어유해》 인용 양상

 

1. ‘올바른’ 한자음을 찾아서: 權萬과 《譯解聲韻考正》

 

조선후기 지식인 계층의 《역어유해》의 수용과 관련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자료로, 영남 南人 계열의 저명한 학자인 權萬(1688~1749)의 경우를 들 수 있다.5) 그는 《譯解聲韻考正》이라는 책을 편찬하는 도중 《역어유해》를 참조했다. 한자의 聲韻을 고증한 성과로 추정되는 권만의 자찬서 《역해성운고정》은 현전하지 않으나, 그 自序가 《江左集》에 수록돼 있어 관련 맥락이 드러난다. 다음은 그 첫 대목이다.

 

우리 조선은 비록 동쪽 하늘 아래 궁벽한 곳에 있지만 그 땅이 遼와 서로 접해 있고 그 별자리는 燕과 分野를 함께 한다.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뉘는 琉球나 일본과는 짝이 되지 않는다. 또한 父師(=箕子)가 華夏의 문물제도로 오랑캐를 변화시킨 일이 있으므로 그 聲音이 중화와 서로 비슷해야 마땅할 터이다. 그러나 그 언어가 문자(=한자)와 일치하지 않고, 그 字音 또한 같지 않으며, 대략 같은 것은 오직 ‘先’과 ‘陽’ 등 몇 개의 韻이다.6)

 

권만에게 조선은 동쪽 변방에 속하기는 하나 遼東과 인접해 있고 燕京과 같은 별자리의 권역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중국과 지리적 조건을 일정하게 공유한다. 게다가 箕子의 영향으로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용한 역사도 있기에 바다 건너 류큐나 일본에 비해 ‘중화’와 더 가까운 것도 당연하다. ‘小中華주의’로 정의될 법한 권만의 사고체계 안에서 가장 문제시된 것은 음성언어의 차이였다. 偏邦의 지식인이라는 한계를 자각하고 ‘중화’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던 권만이 보기에 조선과 중국의 당위적 유사성을 저해하는 요인은 漢字音의 불일치인데, 이와 관련하여 그는 權斗經(1654~1725)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어릴 적 그것(聲音의 차이-인용자)에 대해 백부 小山先生(=권두경)께 여쭈어본 적이 있다.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체로 中州의 천하에 속하며 大禹의 교화가 미치는 곳에 해당하는 땅이라도 五方의 音은 저마다 다르단다.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멀고 외진 곳이야 어떻겠느냐. 우리나라 사람들이 樂府詩를 쓸 수 없는 것은 音律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음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字音이 같지 않기 때문이지.” 마음속으로 慨然했다.7)

 

권두경에 따르자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에서 조선이 변방에 속한다는 평가의 기준이 될 만한 지표는 악부시다. 眞情이 유로된 민간의 노래인 악부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은, 同文의 보편적 문화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터이다. 이 지점에서, 중국인과 음성언어로 의사소통할 개연성이 그리 없어 보이는 권만에게 한자음의 차이가 왜 그토록 문제가 되었는지 뚜렷해진다. 조선의 한자음이 중국의 것과 다르다는 조건이 ‘音律’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음악성을 본령으로 삼는 漢詩의 영역에 접근하지 못하는 장애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권만은 ‘우리나라 사람은 음률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시를 쓸 수 없다’는 권두경의 말에 강개한 심정에 휩싸였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한문을 사용하고 있으되 한시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변방의 지식인’이라는 처지에 대한 자각으로 이해된다.

이상에 언급한 권만의 처지와 심정은 조선의 식자층에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었을 터인데, 이와 관련된 그들의 고민은 주로 한자의 음운을 다룬 韻書를 초점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발현되고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8) 권만 역시 스스로의 불만스러운 처지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음률’이라는 것을 터득하려는 노정을 이어나가는바, 이것이 《역해성운고정》 편찬의 큰 줄기를 이룬다. ‘聲韻’에 대한 검토와 고증이 운서와 유사한 지향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어떤 언어의 ‘음률’을 터득한다는 것은, 우선 해당 언어를 완벽한 발음으로 구사할 수 있다는 말일 텐데, 20대의 권만이 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눈을 돌린 지점도 이쪽이었다. 그는 한양에 들어가 역관들로부터 《老乞大》와 《朴通事》를 입수했다. 해당 언어를 입말로 능숙히 구사하는 전문가로부터 그 교재를 얻은 셈인데, 여기서 두 책은 16세기 초 간행된 《翻譯老乞大》와 《翻譯朴通事》를 가리킨다. 이 책들은 인용된 한어 원문의 아래에 한글로 漢語音이 표시돼 있는바, 漢語音韻史 연구에서 지속적인 주목을 받았다.9) 권만이 《노걸대》와 《박통사》를 참조한 이유 역시 두 책에 전사된 한어음 때문이었다. 권만은 한자음의 발음 방식을 완벽히 알고자 운서를 참조하듯 두 책에 접근했으나, 이 책들은 그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박통사》는 그 내용이 세상에 실행되지 않았고 《노걸대》는 기재된 내용의 범위가 지극히 협소한바, 聲音을 해박하게 제시해 천하 사람들의 정확한 의사소통을 돕기에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10) 운서로 쓰기에는 수록된 어휘 수가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5) 권만에 대해서는 金泳(1993); 李知洋(1991); 신정수(2015) 참조.
6) 吾鮮雖僻處天東, 然其地與遼相接, 其星與燕同分, 與琉球ˎ日本限以大洋海者不侔. 又有父師用夏之變, 其聲音, 宜若與中華相 似者, 而其言語不以文字, 其字音又不同, 所略同者, 惟先陽數韻耳.(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7) 萬少時嘗質之伯父小山先生, 先生曰: “夫以中州寰海之內, 大禹聲敎之所訖, 而五方之音各異. 况東土之僻且遠者哉! 東人之不 能樂府, 坐不解音律, 音律之不解, 坐字音之不同也.” 心竊慨然.(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8) 조선에서 운서의 특별한 의미와 활용법에 대해서는 심경호(2009) 참조. 이에 따르면 조선에서 운서가 詩韻, 경서 및 고전 의 注音, 훈석 등 세 가지 국면에서 중요한 참조 대상으로 활용되었다. 그 중 첫째로 제시된 ‘詩韻의 참조’ 항목이 제대로 된 한시를 쓰고자 한 권만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9) 신용권(2012). 한편 두 책에 표시된 한자음이 15, 16세기 중국 북방음을 반영한 데 대해서는 신용권(2011) 참조.
10) 自弱冠時西入漢陽, 從象譯求所謂《老乞大》ˎ 《朴通事》二書, 《朴通事》不行於世, 《老乞大》所載至狹, 僅足以通二國之情, 不足 以該衆音而通天下之忞忞, 則置不復求解.(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합당한 자료를 얻지 못해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던 권만은 중년에 이르러서야 ‘음률’을 탐구할 계기를 만났다. 50대에 접어든 그는 掌樂院에 소속되게 된바, 당시 장악원 제조를 겸했던 예조판서 尹惠敎(1676∼1739)가 協律官 설치를 추진하며 권만을 그 인원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권만은 ‘음률’을 잘 모르는 처지로 이 일에 참여하는 게 마땅치 않다고 사양했지만, 音價의 정확한 기준을 마련하는 실무자로 추천받은 인연은 자신의 해묵은 문제를 돌아보는 촉발점이 되었다.11)

결국 51세의 권만은 병을 핑계 삼아 휴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과제에 몰두할 수 있었다. 처음 참고가 된 것은 元代 黃公紹가 1292년에 편찬한 《古今韻會》였다.12) 권만은 家藏本이던 이 10책의 운서를 바탕으로 중화의 음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聲韻은 36母音의 체계로 되어 있었는데, 권만은 기술된 내용 중 모음이 다른데 동일한 발음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종종 발견하고는 그것이 ‘7音에 빠르고 느리고 긴급하고 완만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했다.13)

권만은 이 과정에서 《역어유해》와 《五車韻瑞》14) 등 사전류에 해당되는 책들을 참조해 음운을 정밀히 이해하려는 시도를 반복했지만 끝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어긋나는 점이 있었음을 토로했다.15) 《역어유해》의 경우 한어 음가가 한글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한자음을 파악하려는 차원에서 참조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런 취지는 앞서 《노걸대》와 《박통사》를 구해 본 때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1682년 편찬되어 동시대의 한어 어휘가 비교적 풍부하게 수록된 《역어유해》 역시 권만의 의도에 부합하지는 못했다.

한어 어휘집 등을 검토하며 고심을 거듭했음에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던 그의 연구에 길을 열어 준 것은 지인인 李守恒(1695~1768)이 제공한 《四聲通解》 2책이었다. 조선의 대표적 中國聲韻學者 崔世珍(1468~1542)이 중국의 語音현실을 충실히 수집하여 1517년 간행한 《사성통해》는 훈민정음을 사용한 초기의 외국어 표기를 수록했다는 점에서 한국어음운사 연구에 중요하게 쓰이는 자료다.16) 권만은 이 책을 읽고 비로소 한자음에 正과 俗의 차이가 있는 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17) 이 지점에서 그가 봉착한 문제 및 그 해결 방향이 선명해진다.

《사성통해》에는 正音과 俗音, 今俗音 등 여러 종류의 중국어음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 정음은 《洪武正韻》에 기반을 둔 규범음을, 속음과 금속음은 당대의 중국어 현실을 반영한 발음을 가리킨다. 이 책의 범례에 규정된 정음은 ‘五方人이 능히 통하여 이해할 수 있는 소리’라는 《홍무정운》의 정음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18) 따라서 권만이 구분한 한자음의 正俗이란 《사성통해》의 성음 인식을 받아들인 결과라 하겠다. 특히 ‘오방인에게 통용되는 표준음’으로서 정음 개념은 애초 ‘五方의 語音이 저마다 다른’ 데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된 권만의 문제의식과 뚜렷이 닿아 있다.

이런 까닭에 18세기 초반의 조선에 사는 권만은 17세기 후반에 간행되어 당시 한어의 현실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이는 《역어유해》 등으로부터 더 과거로 회귀하여 16세기 초에 간행된 《사성통해》를 가장 준신할 만한 자료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권만은 한자음을 古와 今이 아닌 正과 俗으로 구별하고 있거니와, 그에게 시간에 따른 음운의 변화라든가, 현재 통용되는 한어의 음이 어떤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권만은 《사성통해》에 기재된 ‘正音’을 기준으로 삼아 작업에 완벽을 기하고자 했으나, ‘非’, ‘敷’, ‘泥’, ‘孃’ 등의 聲韻에 대해서는 끝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점에 관해 “한 귀퉁이에 매달린 박과 같은 처지라 끝내 너른 바다를 바라보는 개구리를 면치 못한다”고 문화적 소외감을 표하며 “중국에 들어가 박식하고 고상한 이들과 함께 살면서, 초나라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일절 듣지 않고 莊岳에 내려가 몇 년 공부를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19) 여기서 그가 상정하는 ‘장악’과 같은 언어 환경은 청의 지배하에 있는 동시대의 중국에 있기 어려운 상상적 공간이다. 게다가 그는 《古今韻會》가 원나라 때 이루어진 것이므로 간간이 몽고식 한자음을 취하고 있고, 지금은 또 청나라 음이 중화의 음을 어지럽혀 올바른 한자음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인식했다.20) 이에 그가 체감하는 당대의 언어 현실은 “夷狄이 화하를 어지럽히고 갓과 신이 자리를 바꾼” 것으로 저평가되는데 그는 그 이유를 “字音이 서로 침범해 어지러워지고 宮商이 올바름을 잃은” 데서 찾고 있다.21) 이처럼 권만이 견지하고 있는 표준음에 대한 열망을 통해, 한자음에서 시간성을 소거하고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을 덧씌우는 언어인식의 구도를 엿볼 수 있다. 그에게는 조선의 사대부로서 요청받는 한문교양을 구현한다는 것이 ‘중화’의 음운으로 일컬어지는 규범음을 완벽히 습득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겠는데, 이는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이 영어를 익힐 때 문어 표현에서 고상한 영어와 비속한 영어를 구분하고, 한편으로 또 발음법에서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 흑인 영어 등의 위계를 만드는 방식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러한 구도 가운데 저본이 된 《사성통해》와 명 태조의 勅撰書 《洪武正韻》의 관련성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듯하다. 앞서 《사성통해》의 正音 개념이 《홍무정운》의 내용을 계승한 것임을 언급했거니와, 권만 자신도 이 점을 들어 자신의 저술 《역해성운고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료로 삼고 있다.

 

옛날 大明의 高皇帝가 詞臣 宋濂 등 11인에게 명하여 誠意伯 劉基 등 여러 공과 함께 편찬의 차서를 상의하여 《홍무정운》을 이룬바 오랑캐 원나라의 혼잡한 잘못을 일거에 씻어내고 중화의 雅音으로 돌아갔다. 지금 《사성통해》는 《訓民正音》과 《四聲通攷》 두 책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 두 책은 《홍무정운》을 譯解한 것이다. 이는 우리 莊獻王의 睿裁를 거친 것으로, 자음의 바름이 마땅히 이 책에 벗어남이 없을 것이니, 마침내 이에 의거하여 음을 정립하고 곁에 속음을 주로 달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정과 속의 구분을 이해하고 고착되지도 오류에 빠지지도 않게 하고자 한다. 《성운고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상하 2책으로 정리해 내는 바이다. (…) 이 책이 이루어지매 聲韻이 正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22)

 

권만은 《홍무정운》이 명 태조 때 훌륭한 관료문인들에 의해 편찬된바, ‘오랑캐 원나라’의 그릇된 소리를 일소하고 ‘중화의 우아한 소리’로 돌아가도록 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사성통해》는 《訓民正音》과 《四聲通考》(1447)를 계승한 것인데, 이 두 책은 바로 《홍무정운》을 수용한 것인 데다 세종대왕의 재가를 거친 것으므로 가장 준신할 만하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역해성운고정》이 《홍무정운》으로부터 《사성통고》와 《사성통해》로 이어지는 正音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 책이 당대의 비관적인 언어 현실을 극복하여 ‘올바른’ 소리로 돌아가는 데 일익을 하리라 기대했다.

애초에 권만은 자신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변방의 소국이라는 지역적 한계로 인해 중화의 음률을 정확히 터득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우선 통용되는 회화의 차원에서 한어의 발음을 전사한 책을 읽어 음운에 대한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문제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길은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걸대》나 《역어유해》와 같이 당대의 구어 현실을 재현한 결과물은 과거로부터 지속된 詩의 규칙에 맞춰 음률을 완벽히 구사한 악부시를 쓰는 것으로 표현되는 중화 언어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권만의 구도 안에서 중국의 언어는 박식하고 고상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중화의 언어와, 초나라 말로 비유되는 오랑캐의 변종적 언어로 나뉘게 되는데, 그가 참조한 《역어유해》는 후자의 영역에 속한다고 간주됐다. 실제 그는 《역해성운고정》의 서문에 이어진 범례에서 “《역어유해》는 《노걸대》와 더불어 俗音을 따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사성통해》의 음을 따르고, 곁에다 속음을 주석으로 달아 正音이 어떻게 변했는지 분별하는 데 자료로 삼는다”고 하여23)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은 권만의 언어인식구도 안에서, 자국의 구어에 밀착한 문자로서의 한글이 차지하는 자리는 극히 협소하다. 그는 《역해성운고정》을 편찬하고 그 서문을 쓰며 적지 않은 한글을 사용하고 있으나, 여기서 자국어에 대한 자의식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가 구사하고 있는 한글은 정확한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고, 그의 관심사는 한글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역해성운고정》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권만의 이러한 시도는, 그보다는 오히려 한자음을 한글로 정확히 표기하고자 했던 조선 사대부의 오랜 노력과 맞닿아 있다고 보인다.

기실 표음문자인 한글을 사용하여 중국한자음을 표기하려는 시도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먼저 이루어지고 역점을 기울인 사업이었으며 그 결과 간행된 《홍무정운역훈》(1455)의 중국 한자음 표기 방식은 이후 한국 운서에서 사용된 중국어규범음 표기방식 즉 운서적 표기방식의 기초가 되었다. 그 이후 《노걸대》와 같은 譯學書에서는 正俗音이라 일컬어지는 좌우음의 병기를 통해 운서적 표기방식과 역학서적 표기방식이 공존하도록 배치했다. 이에 정음은 음운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규범음에, 속음은 음운변화의 결과를 반영한 현실음에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정음과 속음의 공존은 《역어유해》와 같은 어휘집의 한자음 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양상을 보인다.24) 권만이 말한 중화의 음운이란 규범음=표준음에 해당하는 한자 語音이며 이는 운서적 표기방식과 正音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1) 丁戊間(1737~1738), 以下儀旅進於朝, 月再仕於樂院. 時國家有鍾聲不比之憂, 以命典樂之臣, 大宗伯尹公惠敎欲白上置協律 之官, 以萬備員, 萬辭以昧音律, 遂移疾南歸.(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윤혜교가 장악원 제조로 임명된 것이 1737년 9월 16일이므로 권만이 협률관 제안을 받은 시기도 이 즈음으로 추정된다. 당시 권만은 예조정랑이었다.
12) 권만이 ‘운회서’라 일컬은 이 책은, 1292년경 황공소가 찬한 《고금운회》가 아니라 그것을 저본으로 1297년 熊忠이 엮은 요약본인 《古今韻會擧要》일 듯하다. 《고금운회》는 동아시아에 현전하지 않으나 《고금운회거요》는 조선 초기 이래 여러 번 간행되어 널리 참조된 것으로 보고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심경호(2009) 및 신용권(2008) 참조.
13) 遂移疾南歸, 課農之暇, 取家藏韻會書十冊, 以所解華音, 譯三十六母之音, 盖自東至葉, 幾盡通解. 然母異音同者, 亦多有之, 是必七音有疾徐緊慢之別.(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14) 《五車韻瑞》: 明代 淩稚隆이 편찬한 사전류의 책으로, 이후 《佩文韻府》의 성립에 기초가 됐다. 한 韻의 아래에 그 운자에 해당하는 사항을 수록한 체재로 되어 있다.
15) 於是參以《譯語類解》ˎ 《五車韻瑞》 等書, 反覆硏究者亦數年, 而終有所牴牾不相合者.(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 6) 권만이 1738년 3월 4일에 말미를 얻어 안동으로 갔고 1738년 5월 12일까지도 돌아오지 않아 改差되었다는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1740년 2월에 典籍에 제수되기까지 별다른 관력이 없는 것으로 보아 권만은 1738년에서 1739 년 사이 집중적으로 음률을 탐구하여 《역해성운고정》을 완성한 듯하다.
16) 신용권(2017) pp168~185.
17) 今年春, 得《四聲通解》二冊於眞城 李仲久, 於是知字音有正與俗之異.(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仲久는 이수 항의 字다. 그는 퇴계 이황의 7세손이다.
18) 신용권(2017)
19) 而非敷泥孃, 猶未融會此, 則前人之所未達而合於一母者也. 萬之寡陋, 又何足以洞解無遺恨也歟. 使萬入中州, 與博雅者處, 楚咻絶於耳, 而下莊岳數年之工, 則敷孃數母之辨, 似或得之七音開闔之間, 而匏繫一隅, 卒不免爲望洋之蛙, 可勝歎哉.(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권만은 자신의 외국어 학습에서 지향하는 바를 ‘장악’이라는 비유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장악’은 《맹자》 〈등문공〉의, “초나라 사람 자식에게 제나라 말을 가르치려면 반드시 제나라 사람을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제나라 사람이 혼자 스승 노릇을 하는데 옆에서 초나라 사람 여럿이 시끄럽게 주절댄다면 아무리 매를 때리면서 가르쳐도 제나라 말을 못할 것이지만 그 사람을 제나라 거리인 장악에다 수년 동안 있게 한다면 역시 아무리 매를 때리면서 초나라 말을 하라 해도 못할 것이다”라는 대목을 출전으로 한다. 그 맥락을 따지자면 《맹자》의 해당 구절은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원어민에게 배워야 하고 더 나아가 본토에 가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낯익은 논조로 읽힌다.
20) 仍竊惟念䪨會書, 成於黃在軒 公紹之手, 間取蒙音, 如瞢母是明公而變爲微公, 微蒙音作위. 矧今黑漢主夏且百年, 淸音亂華, 殆有甚於在軒之世, 何恠乎並變爲滂, 而襌變爲淸也哉?(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21) 今禪變爲淸, 而濁商爲淸商矣. 幷變爲滂, 而濁宮爲淸宮矣. 非母爲徵母, 而宮之全濁者爲次濁矣. 夷狄亂夏, 冠屨易位, 字音侵 亂, 宮商失正, 盖有以也. 精於五音, 如吳季晉曠者可知也. 권만이 관찰한 字音의 변화는 “‘禪’이 ‘淸’으로 변해 濁商이 淸 商이 되고, ‘幷’이 ‘滂’으로 변해 濁宮이 淸宮이 되며. ‘非’의 母가 ‘徵’母가 되고, 宮의 全濁한 것이 次濁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점을 계찰이나 사광처럼 五音에 정밀한 자라면 누구든지 발견할 것이라고 했다.
22) 昔大明高皇帝命詞臣宋濂等十一人, 與誠意伯劉基諸公, 商議繤次, 爲《洪武正韻》, 一洗胡元蹖駁之失, 而返中華之雅音, 今通 解之書, 本諸《訓民正音》ˎ 《四聲通攷》二書, 二書卽《洪武䪨》譯解者也. 是經我莊憲王睿裁, 字音之正, 宜無過於是書者, 遂依 此立音, 傍注俗音, 使覽者辨正與俗之分而不泥不膠, 名曰《聲韻考正》, 釐爲上下二冊. (…) 是書成而聲韻得以返正矣.(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권6)
23) 《老乞大》ˎ 《譯語類解》, 多從俗音, 故一從《四聲通解》立音, 而傍注俗音, 以資正變之辨.(權萬, 〈譯解聲䪨考正序〉, 《江左集》 卷6)
24) 신용권(2014) pp103~132.

 

2. ‘玉薥薥’과 ‘饅頭’가 가리키는 지점: 李瀷과 安鼎福의 어휘 탐구

 

권만이 ‘올바른’ 중국 한자음을 탐구하며 《역어유해》에 한글로 전사된 漢語音을 확인하던 무렵, 畿湖 南人의 대학자 李瀷(1681~1763)도 같은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이익은 《星湖僿說》 〈萬物門〉의 ‘穀名’이라는 항목에서 한자어로 된 ‘五穀의 이름’에 대해 검토했는데, 《역어유해》가 참고자료 중 하나로 인용된 것이다. 이익은 오곡에 해당하는 한자 어휘와 그에 상응하는 조선의 고유어 단어의 짝을 만들어나가며 이 항목을 구성했는데 그 가운데 사용된 ‘俗名’이라는 술어가 바로 고유어 이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어 물명은 ‘耆莊’(기장)과 같은 식의 음차 표기로 제시되었다.

이익의 분석에 따르면, 오곡 가운데 주식이 되는 ‘稻’와 ‘麥’의 경우는 그것이 고유어의 ‘벼’와 ‘보리’라는 데 대해 言衆의 확실한 합의가 있어 미심쩍은 바를 남기지 않지만,25) 기타 곡물의 경우 한자 어휘와 고유어가 꼭 일대일대응하는 것은 아니어서 좀 더 면밀한 접근을 필요로 했다.

먼저 ‘黍’는 조선에서 ‘기장’(耆莊)이라는 훈을 가진다. 이 곡식은 식용 외에 黃鍾管 속에 넣어 기준음을 측정하는 도구로도 쓰이는바, 이 용도로 미루어보아도 ‘기장’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이익은 판단했다.26) 기장의 열매는 조와 비슷하지만 좀 더 알이 굵으므로 대나무로 된 황종관 속에 넣어 기준이 되는 수량을 계산할 때 낟알의 수를 헤아리기에 더 낫기 때문인 듯하다.

다음으로 ‘粟’, ‘稷’, ‘粱’은 비슷한 부류로 묶을 수 있다고 보았다. 字書에서 ‘粟’이 ‘黍’, ‘稷’, ‘粱’, ‘秫’을 총괄하여 일컫는 이름이라 했고, 나중에는 ‘粱’ 가운데 알이 잗다란 것을 ‘粟’이라 한다고 했으며, 《본초강목》에 ‘粟’이 ‘粱’과 같은 품종이며, 다만 ‘粱’에 비해 이삭이 작고 까락이 짧고 낟알이 잘다는 차이가 있다 했는데,27) 이익은 이 세 근거를 인용하여 ‘粟’, ‘稷’, ‘粱’ 세 가지 곡식이 같은 품종에 속한다는 점을 고증했다. 그리고 나아가 이 범주를 대표하는 것이 ‘粟’임을 도출했으며 ‘粟’이 고유어 ‘조’(燥)에 대응한다고 확정했다. 이에 따라 ‘조’는 조선에서도 일군의 곡식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부각되고, 이익은 이 ‘조’에 속하는 부류가 상당히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28) 그는 ‘조’의 부류 중 하나로 ‘靑粱’(청차조)의 예를 들었다.29) 이에 ‘粟’과 ‘粱’은 모두 고유어 ‘조’로 번역해도 무방하게 된다. 다만 ‘粟’이 더 오랜 품종으로 대표성을 갖고, ‘粱’은 그보다 우량하여 알이 굵은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고 보인다.

한편 ‘粟’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곡식 중 ‘稷’은 더욱 면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 곡식은 앞서 언급한 기장이나 조에 비해 식용으로 재배되는 빈도가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중국어 사전에서도 이 어휘에 대해서는 ‘古代의 식용작물’이라는 점이 첫 번째 의미로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稷’이 후세의 言衆에게 중요한 먹거리가 아니고 따라서 여타 곡식에 비해 언어생활에서 간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익은 ‘稷’에 대해서는 유독 그 특징을 자세히 밝혔다.

 

‘稷’은 줄기와 잎은 ‘粱’과 비슷한데 키가 작고 이삭은 벼처럼 흩어져 있으며 낟알은 ‘粱’과 같다. 꺼풀 밖은 빛이 나고 매끄러우며 쌀알은 청색과 황색, 황백색과 검자주색을 띤 것이 있다. 검자주색을 띤 것은 일명 ‘穄’이다. 또 ‘穄’와 ‘稷’은 소리가 같으며 실은 하나의 글자’라 한다. 지금 사람들이 俗名으로 ‘피’(皮)라 하는 것이 ‘稷’이다. 그러나 빛깔이 검자주색이니 정히 이른바 ‘穄’이다. 그런데 황백색 등속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우리나라에는 없는 듯하다. 결국 ‘穄’와 ‘稷’이 글자가 같다면 검자주색인 것을 ‘稷’이라 불러도 된다.30)

 

결론부터 말하자면 ‘稷’은 ‘피’가 분명하다. 조와 비슷한 줄기와 잎을 갖고 있지만 키가 작고, 벼와 비슷하게 흩어진 모양의 이삭이 열리고 낟알은 조와 비슷한데 껍질이 반들반들하다는 묘사가 현재 잡초로 간주되고 있는 피의 형상에 부합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검자주색 열매를 맺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듯한데, 이익의 조사에 따르자면 이 품종에 해당하는 한자는 ‘穄’다. 그런데 ‘穄’와 ‘稷’이 통용되므로 조선에 많이 나는 검자주색 열매의 ‘피’는 ‘穄’라고 일컬으면 되고 또 같은 글자인 ‘稷’이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게 된다. 요컨대 ‘稷’의 훈을 ‘피’라고 보아도 괜찮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이익은 ‘稻’, ‘麥’, ‘黍’, ‘粟’, ‘粱’, ‘稷’ 등의 곡식에 해당하는 한자어에 대해 ‘벼’, ‘보리’, ‘기장’, ‘조’, ‘조’, ‘피’라는 조선의 고유어 이름을 대응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그 과정은 《본초강목》이나 《설문해자》 등의 문헌을 기본적으로 참조한 위에 18세기 조선 농촌의 거주자로서 생활에서 얻은 지식을 더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익이 《역어유해》를 펼쳐 본 것도 이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수수와 옥수수에 관련된 사항을 함께 기술하며 《역어유해》를 언급했다.

 

《六書故》에 “남쪽 사람들은 ‘荻穄’를 ‘黍’라고 한다. ‘荻穄’는 비록 이름이 ‘蜀黍’이지만 ‘黍’와 같은 종류가 아니다.”라고 했다. ‘蜀黍’는 지금의 ‘薥薥’인데 俗音으로는 ‘수수’(秀秀)라고 한다. ‘黍’와 비슷한데 키가 크고 색은 혹은 붉고 혹은 희다. 《譯語類解》를 보면 또 ‘玉薥薥’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삭에는 열매가 없지만 잎 사이에 뿔이 나고 그 뿔의 겉을 껍질이 둘러싸고 있으며 꼭대기에 수염이 나 있다. 껍질 속에 구슬 같은 열매가 있는데 맛이 달아 먹기 좋다.31)

 

《六書故》는 元代 학자 戴侗이 편찬한 字書다. 이익은 그 내용을 인용해 ‘蜀黍’ 혹은 ‘薥薥’이라 불리는 수수를 소개하고 ‘秀秀’라는 그 ‘俗音’을 밝혔다. 앞서 ‘黍’가 조선의 ‘기장’이라 규정했는데, 윗글에 언급된 ‘蜀黍’는 비록 이름에 ‘黍’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기장과 다른 종류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이익이 사용한 ‘俗音’이라는 술어는 1절에서 권만이 썼던 것과는 다른 대상을 지칭한다.

권만은 중국 한자음을 정음과 속음으로 구분하며 전자를 이상적인 규범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당대의 언어현실을 반영한 한어음인 속음은 오랑캐의 언어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한 바 있다. 그러나 이익의 경우 고유어 이름을 ‘속명’이라 일컬으며 ‘기장’이나 ‘조’와 같은 물명을 음차표기해 재현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사용한 ‘속음’은 역시 고유어 어휘의 소리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즉 같은 ‘속음’이지만 권만의 경우는 당대 중국어의 현실 발음을, 이익의 경우는 조선의 고유어 발음을 각각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역어유해》에 ‘玉薥薥’이라 기재된 한어 어휘는 ‘薥薥’의 ‘속음’을 이월받아 ‘옥수수’라는 조선어 이름을 갖는다. 실제로 《역어유해》의 ‘玉薥薥’ 항목 아래에는 한글로 ‘옥슈슈’라는 협주가 달려 있는데 이는 해당 어휘의 한어 발음이 아니라 고유어 의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한편 ‘잎 사이에 뿔이 나 있고, 그 겉을 둘러싼 포장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수염이 나 있는데, 그 포장 속에 구슬 같고 맛이 달콤한 열매가 있다’는 이익의 묘사는 분명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옥수수’라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정리하며 기술하는 이익의 태도는 《성호사설》 전체에 일관된 현실과의 밀착성을 반영하고 있다.

실재하는 대상을 파악하고, 그 대상에 상응하는 명칭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역어유해》와 같은 사전류의 문헌을 참조하는 이와 같은 독서법은 이익의 제자인 安鼎福(1712~1791)에게도 유사하게 계승되었다. 1786년, 75세의 안정복은 다음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역어유해》를 참조했다.

 

질문: ‘만두’(饅頭)는 지금의 연포(軟泡: 두부)입니까? ‘고’(糕)는 지금의 무슨 음식입니까?32)

 

‘만두’와 ‘고’가 무엇인지 물어 본 이는 安景漸(1722~1789)이다. 이 질문은 〈안정진의 《가례》 문목에 답하다〉(答安正進家禮問目)에 수록된 것으로, 여기서 《가례》란 《朱子家禮》다. 이익의 문인으로 경상도 밀양에 거주하던 안경점은 《주자가례》의 세부 절목에 관한 의문을 편지로 보냈고 안정복은 다음과 같이 성실히 답했다.

 

답: ‘朔奠’ 조에 ‘麵米食’이라고 되어 있는데, 麵食(밀가루 음식)과 米食(쌀가루 음식)을 일컫습니다. 이 말은 《書儀》에 나오는데, 주석에 “면식은 餠饅頭를 일컫고 미식은 粢餻(쌀떡)의 종류이다”라고 했습니다. ‘時祭’ 조의 ‘饅頭糕’는 만두와 떡을 일컫는데, 이 점은 ‘삭전’ 조의 글과 다르지 않습니다. 찬선을 올릴 때 면식을 먼저 올리고 미식은 나중에 올립니다. 그래서 면식은 서쪽에 미식은 동쪽에 있게 됩니다. 지금 풍속에 밀가루를 발효시켜 떡소를 넣거나 넣지 않거나 하여 찐 음식을 만두라고 합니다. ‘餠’이라는 것은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해 만든 것입니다. 일찍이 《譯語類解》를 보니 만두는 바로 우리나라 풍속의 상화병이었습니다. ‘糕’는 《본초강목》에 찹쌀을 멥쌀가루와 섞어 찐 것인데, 모양이 기름 엉긴 것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찹쌀가루로만 만든 것을 ‘粢’라 하고, 멥쌀가루를 섞은 것에 콩가루나 당밀을 더해 만든 것을 ‘餌’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체로 우리 나라에서 인절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떡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33)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만두’를 “밀가루 따위를 반죽하여 소를 넣어 빚은 음식. 삶거나 찌거나 기름에 튀겨 조리하는데, 떡국에 넣기도 하고 국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라고 정의한다. 만두는 한반도에서 유래가 오랜데, 애초에 밀가루 반죽에 소를 넣은 음식으로서, 달콤한 소를 넣어 간식으로 만든 것도 있었고 육류와 채소를 넣어 식사 대용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그러다 후대로 갈수록 후자의 의미가 지배적이게 된바, 안경점 역시 우리도 공유하는 만두의 낯익은 의미에 대해 문득 의문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饅頭를 두고 두부인지 묻는 일견 엉뚱해 보이는 이 질문은 이 한자어가 한반도 외의 곳에서는 다른 대상을 가리킬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겠다. 65세의 안경점은 자신이 주재하는 奉祭祀에서 《주자가례》에 제시된 절목을 최선을 다해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주자가 일컬은 饅頭’를 정확히 알고자 동문의 선배인 안정복에게 질문을 한 것이다. 지나칠 정도의 자상한 설명 끝에 ‘饅頭’와 ‘糕’ 두 음식이 떡에 해당한다고 결론짓는 안정복의 어조에서, 《주자가례》와 관련된 이 문제를 다루는 두 조선 노인의 진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안정복은 ‘饅頭’와 ‘糕’라는 두 대상이 《주자가례》 안에서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문헌고증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朔奠에 올리는 가루 음식은 麵食과 米食이라는 짝을 이룬다. 면식으로는 밀가루로 만든 ‘餠饅頭’가, 미식으로는 쌀로 만든 ‘粢餻’가 대표적이다. 안경점이 문의한 ‘饅頭’와 ‘糕’는 《주자가례》 중 時祭에 올리는 제수로 나란히 언급된 것인데34) 이것이 앞서 말한 삭전의 면식인 병만두와 미식인 자고에 각각 대응한다고, 안정복은 명쾌히 규정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書儀》를 주로 인용했다. 사마광의 저술로서 《주자가례》의 토대가 된 《서의》는 18세기 조선에서 《주자가례》의 이해와 관련하여 참조된 적이 많다.35)

다음으로 안정복은 ‘饅頭’와 ‘糕’의 세부사항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 먼저 ‘饅頭’는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킨 것에 떡소를 넣거나 넣지 않거나 하여 빚어 쪄 낸 음식을 가리킨다. 반죽을 발효하고 떡소를 넣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만두와는 좀 다른 음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자가례》를 실천하려면 만두에 해당하는 제수로 무엇을 올릴지가 문제시된다. 안정복은 이에 한어 어휘 사전인 《역어유해》에서 ‘饅頭’를 검색하여 그 고유어 의미를 찾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화병’이라는 음식이다. 실제로 《역어유해》 〈食餌〉 부의 “饅頭” 항목에는 ‘상화’라는 한글 협주가 달려 있다. ‘상화병’ 혹은 ‘상화떡’이라고도 하는 상화는 “밀가루를 누룩이나 막걸리 따위로 반죽하여 부풀려 꿀팥으로 만든 소를 넣고 빚어 시루에 찐 떡”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의되어 있다.36) 고려가요 〈雙花店〉에서 회회아비가 취급한 음식 ‘雙花’가 바로 이것이었던 듯한데, 조선 초 金宗直(1431~1492)의 〈先公祭儀〉에서도 流頭節의 時祭에 상화를 진설한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아울러 안정복은 ‘糕’에 해당하는 조선 음식에 대해서도 《본초강목》을 검토하여 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로 반죽한 것을 쪄서 만든 떡으로, 거기에 당밀이나 콩가루 등을 입힐 수도 있는바, 조선의 ‘인절미’라는 음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饅頭’와 ‘糕’는 모두 떡으로 분류되는 음식이고 여기 해당하는 제수를 올리고자 한다면 상화와 인절미를 준비하면 된다는 결론이다. 여기에 이르는 가운데 안정복이 《역어유해》를 참조하는 방식에는, 중국 문헌에 기록된 규범을 정확히 파악하되 그것을 조선 현실에 비추어 적절히 번역하려는 태도가 개입해 있다. 다시 말해 奉祭祀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문화권 안에서 《주자가례》라는 규범을 공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똑같은 제사상을 차리되, 한 가지 祭需를 두고도 ‘饅頭’와 ‘상화’라는 다른 명칭이 각각 가능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한자어 물명에 대한 적절한 번역의 문제가 대두된 상황을 여기서 볼 수 있다.

 

25) 五穀之名, 人或不能辨, 惟稲麥無可疑.(李瀷, 《星湖僿說》 萬物門 〈穀名〉)
26) 黍則以黄鍾之實, 推之, 非俗名耆莊者, 則不冝扵管中之用也.(李瀷, 《星湖僿說》 萬物門 〈穀名〉)
27) 粟ˎ稷ˎ粱三者, 大抵相類, 字書云: “古者粟為黍ˎ稷ˎ粱ˎ秫之緫名. 後人專以粱之細者, 名粟.” 李時珍曰: “粟即粱也, 穗大毛長, 粒粗為粱, 穗小毛短, 粒細為粟, 苗皆似茅也.”(李瀷, 《星湖僿說》 萬物門 〈穀名〉)
28) 실제로 《增補山林經濟》에 기재된 곡식의 명칭 중에도 ‘조’(粟)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가장 많아 15종이나 된다. 유중림 (2003) pp378~380.
29) 今俗名粟為燥, 其屬極多, 而有靑粱者, 穗小毛短, 則恐是古所謂粱, 而随其色有靑ˎ黃之稱也(지금 속명에서 속을 ‘조’라 하는 데 여기 속한 것들이 몹시 많다. ‘靑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삭이 작고 까락이 짧은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옛날에 이른 바의 ‘粱’인데 그 색을 따라 청량이니 황량이니 일컫게 된 것 같다). (李瀷, 《星湖僿說》 萬物門 〈穀名〉) 이하 〈곡명〉의 표점과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제공된 것을 참조하여 필자가 고쳤다.
30) 稷莖葉似粱而卑, 穗㪚如稲, 粒如粱, 稃外瑩滑, 米靑黄又有黄白紫黒, 紫黒者一名穄, 又云穄稷同聲, 實一字, 今人以俗名皮 者, 為稷, 然色紫黒, 正所謂穄也. 而不見有黄白之屬, 恐我國無有也, 畢竟穄稷字同, 則呼紫黒者為稷, 亦可.(李瀷, 《星湖僿說》 萬物門 〈穀名〉)
31) 《六書故》云: “南人謂荻穄為黍, 荻穄雖名蜀黍, 與黍非一種.” 蜀黍是今薥薥, 俗音作秀秀, 似黍而髙大, 色或赤或白.見《譯語 類解》, 又有玉薥薥者, 穗無實, 葉間生角, 角外有苞, 上有鬚, 苞裡有實如珠, 味甘可食.(李瀷, 《星湖僿說》 萬物門 〈穀名〉)
32) 問: 饅頭今軟泡耶? 糕今之何食耶? (안정복, 〈答安正進家禮問目〉, 《順菴集》 권7) 이하 〈答安正進家禮問目〉의 표점과 번역 은 이상하 역주, 《교감역주 순암집》을 참조하여 필자가 약간 고쳤다.
33) 答: 朔奠條麵米食, 謂麵食及米食也. 此出《書儀》, 註云麵食, 餠饅頭之稱, 米食, 粢糕之類. 時祭條之饅頭糕, 謂饅頭及糕也, 與朔奠文無異. 凡進饌, 先麵而後米, 故麵西而餠東也. 今俗屑麵發酵, 或有饀或無饀饀소, 蒸食者謂之饅頭, 餠者, 溲麵使合幷 也. 嘗見《譯語類解》, 饅頭卽東俗之霜花餠是也. 糕, 《本草綱目》, 以黍糯合粳米粉蒸成, 狀如凝膏也. 單糯粉作者曰粢, 米粉合 豆末糖蜜蒸成者曰餌, 此三者微有分別, 而盖皆東俗인졀미之類, 而緫名爲餠也.(안정복, 〈答安正進家禮問目〉, 《順菴集》 권7) 34) 《주자가례》 권5 〈祭禮〉 중 四時祭에 “肉ˎ魚ˎ饅頭ˎ糕, 各一盤”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35) 김윤정(2017).
36) 貞一堂 南氏(1840~1922)의 《貞一堂雜識》에 ‘유두날 만들어 먹는 밀가루떡’으로 상화의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백두현 (2013).

 

3. ‘稷’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丁若鏞과 金邁淳

 

이익이 조선에서 재배되는 곡식의 이름을 검토하며 《역어유해》를 참조하던 시기로부터 약 한 세기 뒤, 저명한 관료문인 金邁淳(1776~1840)도 비슷한 이유에서 같은 책을 찾아 보고 있었다. 김매순은 자신의 필기류 저술인 〈闕餘散筆〉에서 ‘稷’이라는 한자 어휘에 대해 천착하던 도중 《역어유해》의 관련 항목을 참조했다. 2절에서 이익이 문헌고증과 직접경험에 의거하여 ‘稷’을 ‘피’로 규정하는 과정을 살폈는데, 柳重臨(1705~1771)이 편찬한 《增補山林經濟》 등의 농서에서도 그 설이 보편적으로 통용됨을 확인할 수 있다.37) 그런데 김매순은 ‘稷’이 ‘피’를 지칭한다는 당대의 통설에 반하여, ‘稷’은 ‘粟’ 즉 ‘조’라는 견해를 제시한바,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중국의 각종 문헌을 다음과 같이 두루 인용했다.

 

“稷”이란 것은 ‘粟’이다. 《爾雅》의 “粢稷”에 대한 주에, “江東 사람들은 ‘粟’을 ‘粢’라 부른다”고 했는데 여기 대한 疏에서는 “‘粢’와 ‘稷’과 ‘粟’은 바로 동일한 물건이다”라고 했다. 《설문해자》에 대한 徐氏(徐鉉)의 箋에 “稷은 ‘穄’와 한 가지 이름으로 초나라 사람들은 ‘稷’이라 했고, 관중(關中)에서는 ‘穈’라 했는데, 黃米에 해당한다”라고 했다. 《시경》의 〈黍離〉에 대한 集傳에서는 “‘稷’은 ‘黍’와 비슷한데 작으며 간혹 ‘粟’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런 여러 설에 근거하건대, ‘稷’과 ‘粟’은 본디 두 가지가 아니며, 그것이 지금의 이른바 小米라는 점은 확실하다.38)

 

‘粟’이 小米(좁쌀)라는 것은 누구든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稷’은 현재 통용되는 한자 사전을 참조한다면 ‘피’와 ‘기장’이라는 두 가지 식물을 지칭하며 이는 김매순의 당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김매순은 ‘稷’이라는 한자에서 ‘피’라는 훈을 제거하고 ‘조’로 대체하기 위해 사전류의 주석서에 나타난 정의 및 용례를 인용했다.

이어서 그는 ‘직’이 좁쌀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덧붙이는데, 그에 따르면 논농사가 보편화되기 이전의 먼 옛날에는 인류의 주식이 黍稷이었고, 그러므로 聖人이 귀중히 여기어 오곡 중 으뜸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었다. 그런데 《本草經》의 서열에서 ‘稷米’와 ‘粟米’를 구분하여 전자를 후자보다 아래의 등급에 속한 곡식으로 간주하면서부터 이 둘이 별개의 것으로 나뉘었고,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잘못된 분류가 더욱 심화, 고착되어 ‘稷’을 ‘稗’ 즉 피와 동일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9)

김매순이 보기에 ‘稗’는 ‘稊稗’(돌피-인용자)로서 곡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직’의 한 의미를 구성하기에 부적절하다. 이에 그는 《역어유해》에서 ‘稗’에 해당하는 항목을 찾아보아 그 訓이 ‘피’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 점을 ‘稗’라는 중국어와 ‘피’라는 조선어가 상호독점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설의 근거로 삼는다. 즉 ‘稗’의 華音(중화의 한자음)이 우리나라에서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의 소리인 ‘피’와 유사하므로 ‘피’는 ‘稗’의 번역어임에 틀림없고 ‘稷’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40) 《역어유해》의 기술을 인용하며 이로써 자신의 논리에 대해 “이미 절로 명백해졌다”고 쐐기를 박은 데서, 그가 이 자료를 상당히 준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稷’이 좁쌀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는 김매순의 견해는 보편타당하다 보기 어렵다. 그가 들고 있는 문헌의 내용은 ‘稷’이 좁쌀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는 데 대해서는 일정한 근거를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오로지 좁쌀이라는 한 가지 대상만을 지시하며 ‘피’는 그 의미범주에서 제외된다는 설의 근거가 되어 주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槐’라는 하나의 한자가 콩과에 속한 회화나무와 느릅나뭇과에 속한 느티나무 두 가지를 모두 지칭하고 있는 것과 같이, 특정한 하나의 한자가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는 예는 비일비재하다. 또한 피는 농경이 시작될 무렵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여 구황작물로 상당히 중시되었다는 역사를 지닌 벼과의 식물로서 좁쌀보다 굳이 하찮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마지막으로 한자인 ‘稗’의 발음이 그 조선어 훈인 ‘피’와 유사한 것은 해당 작물이 중국으로부터 도래한 데 따른 것인지,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문제이고, 그 자체로 ‘稷’에 ‘피’라는 의미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데 대한 논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통용되는 한자 사전을 보건대 그의 이 견해는 별다른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김매순은 어째서 일견 무리해 보이는 그와 같은 견해를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제기한 다음 의문이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럼에도(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稷은 粟과 같음에도-인용자) 서당 훈장이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어김없이 피 직(稷)이라고 하니 이보다 큰 오류가 있을 수 있겠는가?41)

 

위의 인용문은 당시 조선에 통용되던 한자의 훈에 대한 김매순의 불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한자가 조선어로 제대로 번역되고 있지 않다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 ‘稷’ 한 글자와 관련한 길고 복잡한 추론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직’이 ‘피’로 간주되는 것이 그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가 다시 궁금해지게 되는데, 이 점에 관해 김매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稗(피)에는 水稗와 旱稗 두 가지가 있다. 수패라는 것은 가라지 같은 잡초의 부류인데 대궁과 잎이 벼와 꼭 닮았고, 다만 마디 사이에 털이 나 있지 않을 뿐이라 김을 매는 자도 분간하기 어려워한다. 한패라는 것은 대궁과 잎이 稷과 비슷한데 그 짚은 말을 먹이기에 적당하고 그 열매는 蕡(들깨 혹은 삼씨-인용자)과 비슷한데 약간 검다. 늦게 파종하여 일찍 거둬들이고, 산간이나 강가에서 모두 잘 자라므로 田野의 小民들이 간혹 주된 식량으로 우러르기도 하니 곡식의 부류로 승격시켜도 안될 것은 없지만 그것이(피가-인용자) 稷의 지위를 찬탈한다면 실로 분수에 넘고 거짓된 일에 해당된다 하겠다. (…) (피는-인용자) 식량으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곧 簠簋에 담겨 종묘사직에 바쳐지고 버젓이 黍와 짝이 되는 상등의 곡식이 된 것이다. 못나고 어리석은 자가 尊顯의 지위를 차지하고 현인과 성인이 正道를 따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어찌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랴? 사물에도 그런 일이 있다. 그러니 뜯어고쳐 정리하고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42)

 

요컨대 김매순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稷’에 대한 번역이 부정확하게 이루어진 결과, 하찮은 잡초에 가까운 ‘피’가 종묘사직에 바쳐지는 중요한 제물로 존중받는 현실이었다. 그는 ‘피’가 곡식이 아니라던 앞서의 말을 뒤집어 ‘곡식의 부류로 승격시켜서 안 될 것도 없지만’이라 하여 한발 물러나면서도 그와 같은 하찮은 ‘피’가 종묘사직의 제사를 상징하는 ‘黍稷’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 대해서는 유교적 가치를 개입시켜 ‘찬탈’이라는 엄중한 비난을 한다. 서당 훈장의 ‘피 직’이라는 통속적 訓釋이 단순한 오류라면 그 훈석을 받아들인 나머지 제수로서 ‘피’를 올리게 된 것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번역의 오류가 단서가 되어 유교국가의 질서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텐데, 이와 같은 김매순의 생각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에는 각자의 분수와 위계가 있고, 그것을 뛰어넘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유교이념의 언어학적 변주로 받아들여질 면모가 없지 않다.

그런데 이상에 언급한 김매순의 견해는 그의 문집에 수렴된 〈궐여산필〉 외 다른 저자의 책에도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어 주목을 요한다. 丁若鏞(1762~1836)의 《雅言覺非》가 바로 그것이다. 《아언각비》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해배된 직후인 1819년에 완성한 저술이고, 김매순은 정약용이 해배된 후 교유한 인물로 꼽히므로, 두 학자의 저술 사이에 일부 공통된 내용이 있다는 점은 그들의 학문적 교류를 시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언각비》의 35번째 조목인 ‘稷’의 내용은 ‘직’이 ‘粟’이라는 단정에서부터, 그 근거로 《이아》의 注疏와 《설문해자》의 箋註 및 논농사가 보편화되기 이전 시기에 백성들이 ‘직’을 주식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고 있는 점,43) ‘직’과 ‘속’이 분리되게 된 계기로 《본초경》의 서열상 분류를 언급한 점, 俗儒들에게서 ‘직’의 의미가 혼동되어 받아들여진 점, 그리고 우리나라에 이르러 와전의 정도가 더욱 심해져서 분수에 넘치게도 ‘피’가 祭器에 담기는 곡식으로 존중받게 된 데 대한 개탄에 이르기까지44) 앞서 김매순이 개진한 논리와 酷似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정약용이 말한 ‘속유’라는 계층은 김매순이 비판한 ‘서당 훈장’을 환기하는 바가 있어, 이들이 조선의 통속적 한자 訓釋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 문제의식은 결국 “세상에 통용되는 풍속이 서로 전파됨에 따라 언어가 진실을 잃게 되고, 거듭하여 오류를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익숙해진 나머지 살피려 들지 않는다. 우연히 한 가지 잘못된 점을 발견하면 그에 따라 여러 의문이 일어나니, 오류를 정정하고 진실을 회복하는 데 밑바탕으로 삼을 수 있다”45)는 《아언각비》의 저술 취지에 수렴되고 있는바, ‘속’의 언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 대척점에 俗語의 오류를 정정하여 진실을 회복한 이상적 언어를 상정하고 있는 정약용과 김매순의 언어학적 구도를 그려볼 수 있다.

김매순은 ‘稷’이 ‘피’라는 훈을 갖는 데 대해 통속적인 오용으로 간주하며 불만을 드러냈는데 이러한 시각은 《아언각비》를 저술한 정약용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논의에서 주된 관심의 대상은 한글로 표기된 조선의 고유어가 아니라 조선의 수많은 한자와 한자어들이다. 이 어휘들은 필연적으로 중국 고전 한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뿌리가 제대로 박혀 있는지, 그래서 원래의 의미대로 정확히 사용되고 있는지의 문제가 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37) 《증보산림경제》 권2 〈治農〉 조에는 곡식의 종류를 분류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기장과 조, 피, 수수에 속한 다양한 곡물명을 한 항목에 묶어 “黍기쟝 粟조 稷一名穄피 蜀黍슈슈 品”이라는 제목 아래 제시하고 있다. 이는 한자에 해당하는 고유어 뜻을 한글로 병기한 표기다. 유중림(2003)에 수록된 원문 영인본 380면 참조.
38) “稷者粟也, 《爾雅》粢稷之注曰: “江東人呼粟爲粢, 疏云粢也ˎ稷也ˎ粟也, 政是一物.” 《說文》徐箋曰: “稷卽穄一名, 楚人謂之稷, 關中謂之穈, 其米爲黃米.” 《詩》〈黍離〉集傳曰: “稷似黍而小, 或曰粟也.” 據此諸說, 則稷與粟, 元非二種, 而其爲今之所謂小 米也審矣.(金邁淳, 〈闕餘散筆〉, 《臺山集》 卷20)
39) 古者水田未盛, 生民大食, 莫要於黍稷, 故聖人貴之以冠五穀也. 乃《本草》序列稷米在下品, 而別有粟米在中品, 於是流俗傳訛, 遂以粟與稷, 判作二物, 而東俗更甚, 能知小米之爲粟, 而不知粟便是稷, 以所謂稗者當之.(金邁淳, 〈闕餘散筆〉, 《臺山集》 卷 20)
40) 夫稗者稊稗也. 《孟子》曰: “五穀不熟, 不如稊稗.” 其非穀類可知. 《譯語類解》, 訓稗爲皮華音稗, 與東音皮相近已自明白.(金邁 淳, 〈闕餘散筆〉, 《臺山集》 卷20) 한편 여기서 김매순은 “稊稗”가 곡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의 근거로 “오곡이 잘 익지 못하면 稊稗만도 못하다(잘 익히지 않은 오곡을 먹느니 차라리 稊稗를 잘 익혀서 먹는 것이 낫다-인용자)”는 《맹자》의 한 구절을 들고 있는데, 이 역시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稊稗’가 먹을 수 있는 곡식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으 로 읽힐 수 있다.
41) 而塾師訓蒙, 輒曰皮稷, 誤有大於此者乎?(金邁淳, 〈闕餘散筆〉, 《臺山集》 卷20)
42) 稗有水稗旱稗二種, 水稗者稂莠之屬, 莖葉與稻酷肖, 惟節間無毛, 耘者難辨. 旱稗者莖葉似稷, 其稈宜於飼馬, 其實如蕡而微 黑, 晩種早收, 峽沿俱宜, 田野小民, 或仰爲恒粮, 升諸穀類, 固無不可, 而以之簒稷則實涉僭僞. (…) 用爲餱粮, 今乃登之簠簋, 薦之廟社, 儼爲配黍之上穀, 闒茸尊顯, 賢聖逆曳, 豈惟人也, 物亦有之. 釐革歸正, 在所不已.(金邁淳, 〈闕餘散筆〉, 《臺山集》 卷20)
43) 다만 이 부분에 대해 《아언각비》에서는 ‘지금도 북쪽 지방에서는 그렇게들 하고 있다’(밭농사를 위주로 하여 稷을 주식 으로 삼고 있다-인용자)는 협주를 덧붙였다.
44) 稷者, 粟也. 方言粟曰䆆. 《爾雅》粢稷之注曰: “江東人呼粟爲粢, 疏云粢也稷也粟也, 正是一物.” 《曲禮》 云: “稷曰明粢.” 《說 文》徐箋云: “稷卽穄, 一名粢, 楚人謂之稷. 關中謂之穈其米爲黃米.” 古者水田未盛, 生民大食稷爲恒糧今北方猶然, 故聖人貴 之. 乃《本草》 序列, 稷米在下品, 別有粟米在中品, 又似二物 《爾雅》 疏, 故俗儒惑焉, 吾東傳訛更甚, 以稗爲稷, 牢不可破. 夫稗者稊稗也, 似禾而別, 不在五穀之列.方言謂之秛, 秛與稗聲轉也. 有水稗旱稗二種, 水稗莖葉與稻酷肖, 唯節間無毛, 芸者 難辨, 旱稗莖葉似稷, 更加豐茂, 其稈宜於飼馬, 其實如蕡而微黑. 吾東田種, 遂爲穀類. 然稷者五穀之長, 以稗爲稷, 豈不僭 歟? 大小祭祀簠簋之實, 遂以黍稗, 用充黍稷, 大不可也.(丁若鏞, 《雅言覺非》 ‘稷’ 항목) 
45) 流俗相傳, 語言失實, 承訛襲謬, 習焉弗察, 偶覺一非, 遂起羣疑, 正誤反眞, 於斯爲資, 作《雅言覺非》三卷.(丁若鏞, 《雅言覺非》)

 

4. 언어학자의 중립적 시선: 李德懋와 李圭景

 

김매순보다 한 세대 앞서 태어난 李德懋(1741~1793)의 경우, 앞서 다룬 漢語 物名과 그에 따른 번역의 문제를 좀 더 자국어중심적인 차원에서 탐구하고 있다. 이덕무는 조선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물명이 漢語로 무엇이라 표기되는지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더 폭넓은 시야에서 조선의 한자가 어떤 식의 특수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하는데, 이 점은 이덕무가 지닌 조선어 사용자이자 언어학자로서의 전문적 태도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이덕무는 자국에서만 특정 용법으로 쓰이는 이른바 조선식 한자라는 개념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閬”이라는 한자가 조선의 경우에 한해서만 ‘腎囊’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알고 있던 중, 《蒙語類解》에서 “閬”이라는 표제어 아래 ‘腎囊’이라는 훈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알기로 《몽어유해》는 어떤 物名을 中原語로 크게 쓴 다음 그 아래에 해당 몽고어와 조선어 어휘를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각각 주석으로 제시하는 체재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와 같다면 중국어에서도 “閬”이 ‘신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역어유해》는 물론 《同文類解》, 《박통사》, 《노걸대》 및 중국 演義小說까지 상고해 보았으나 중국어에서 “閬”이 ‘신낭’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며 위의 사항에 대해 편집자의 실수가 아닌가 추측했다.46)

또한 이덕무는 ‘말굽쇠’라는 한 사물이 현재 존재하고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역사적 맥락을 따지며, 이 물건이 한어로는 ‘馬脚匙’라 불린다는 것을 《역어유해》를 통해 파악했다고 밝혔다.47) 그는 해당 항목에서 중국, 일본, 조선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말편자가 어떤 식으로 사용되거나 변용되고, 또 어떤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지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한어와 고유어로 이루어진 짝을 만드는 번역이라는 의도 이상의 폭넓은 언어학적 시야를 확보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덕무에게서는 《역어유해》가 자국어 어휘에 대한 전면적인 학적 검토의 차원에서 한 자료로 참조되고 있고, 한어와 고유어가 일대일대응되는 식으로 정확하게 번역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된 듯하다. 그에게는 조선의 구체적 현실을 담고 있는 조선의 물명을 다각도로 검토하여 해당 어휘에 대해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며 구체적인 지식의 체계를 정립하는 일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덕무의 이런 점은 그의 손자 李圭景(1788~1863)에게로 계승된다. 그는 한문을 전용하는 사대부 지식인 계층에서 《역어유해》를 수용한 데 대한 역사적 검토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될 만할 인물이다. 이규경은 조부가 소유한 방대한 자료와 함께 그 학적 태도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언어학자로서 이 조손간의 역량을 검토하는 것은 별도의 논의를 요하는 일이므로, 《역어유해》라는 한 가지 자료로 다시 돌아와 해당 자료를 다루는 이규경의 방식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규경은 어떤 문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역어유해》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五洲衍文長箋散稿》의 각종 辨證說에서 《역어유해》에 제시된 한어 물명과 그에 대한 한글 표기의 협주를 다수 전재했다. 그 중 하나로 〈山野菜辨證說〉을 들어 본다.

 

나는 지금 각종 잡초가 우거진 산야에 살며 산나물 캐고 물고기를 낚아 먹을거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산은 헐벗고 물은 메말라 한 포기 푸성귀와 한 마리의 생선도 입에 넣기가 쉽지 않다. 항상 홀로 앉아 屠本畯의 《野菜箋》48)을 즐겨 읽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중인데, 산과 들에서 나는 나물들 역시 그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古書에서 대략 취하여 변증해 보았다.

 

정자(莛子): 부룻대, 적근채(赤根菜): 시금치, 고채(苦菜): 씀바귀, 세투리라고도 함. 낙려(洛藜): 도투라지. 인행(芢荇): 비름, 마제채(馬蹄菜): 곰달래, 산장채(酸醬菜): 꽈리, 양제채(羊蹄菜): 소루쟁이, 구각종채(狗脚腫菜): 꽃다래, 자화채(紫花菜): 도아리, 권두채(拳頭菜): 고사리, 산근채(山芹菜): 참나물, 관중채(貫衆菜): 회초미(호랑고비), 요두채(搖頭菜): 두릅, 군달채(莙薘菜): 근대, 녹각채(鹿角菜): 청각, 황각채(黃角菜): 듬복이, 제니(薺苨): 게로기(모싯대), 산삼(山蔘): 더덕, 누호(蔞蒿): 물쑥, 총필두(蔥筆頭): 파종지, 유호채(留蒿菜): 평지(유채), 회채(灰菜): 명아주, 자채(紫菜): 초죡기(쑥부쟁이), 호초(蒿草): 다북쑥. (…) 해온(海蘊): 파래, 자채(紫菜): 감태, 자연(紫䓴): 김, 海帶: 베육(다시마), 불갑초(佛甲草): 돌나물, 역(蒚)ˎ엄(䕾)ˎ음(荶): 달래, 동호(同蒿)ˎ고려국(高麗菊): 쑥갓, 보방(蒲梆): 부들주지, 호로선(葫蘆旋): 박고지, 승모화(僧帽花): 도라지꽃, 녹매화(綠梅花): 닭의십꽃, 연봉(蓮蓬): 연송이, 수율(水栗): 마름, 권단화(捲丹花): 가너리꽃, 수홍화(水葒花): 요화, 포공초(蒲公草) 혹은 포공영(蒲公英): 앉은뱅이꽃, 또는 민들레.49)

 

인용문의 서두 부분에서, 실생활의 한 중요한 국면을 구성하는 산야초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각각을 호명하고 또 그 이름을 백과전서적 저술 안에 문자로 기록하려는 저술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일생을 서울에서 보냈던 이덕무와 달리, 이규경은 忠州로 낙향하여 공부와 저술을 이어나갔는데 위 인용문의 ‘산야’란 그와 같은 삶의 조건을 언급한 것일 테고, 이는 그가 조부의 학문을 계승한 위에, 농촌생활을 반영한 구체적 지식을 더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규경은 《역어유해》와 《동문유해》, 《화한삼재도회》 등을 통해 조선 땅에서 나는 산야초의 이름을 추출하여 목록을 만들되, 漢語 명칭을 한문으로 쓰고 그에 상응하는 자국어 명칭을 한글로 표기하여 제시했다. 그 결과 위와 같이 이규경이 제시한 산야초의 목록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고 상세한데, 특히 주목할 것은 산야초의 명칭과 관련하여 한어와 고유어의 짝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가지 대상에 대해 두 가지 이상의 고유어 명칭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규경은 苦菜의 번역어로 씀바귀와 세투리를 적었고, 포공초=포공영의 번역어로 앉은뱅이꽃과 민들레를 적고 있는데, 이 가운데 낯선 이름인 세투리는 씀바귀의 함경도 방언이고 앉은뱅이꽃은 주로 제비꽃의 방언으로 알려져 있으나 민들레의 평안도 방언이기도 하다.

한편, 위에 제시한 어휘 가운데 밑줄로 표시한 것이 《역어유해》를 참조한 결과로 추정된다. 그 중 “赤根菜: 시금치”로부터 “蔥筆頭: 파종지”까지는 《역어유해》의 〈菜蔬〉 부에서, “灰菜: 명아주”로부터 “水葒花: 요화”까지는 같은 책의 〈花草〉 부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50) 《역어유해》의 분류법을 기준으로 삼고, 한어를 표제어로 하여 상응하는 고유어 물명을 한글로 표기한 데서, 이규경이 《역어유해》의 체재를 준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이규경은 《역어유해》 외 여러 종의 외국어 사전에 해당하는 어휘집을 참조하여 자신의 세계를 物名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애초에는 외국어 어휘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행위처럼 보였지만, 하나의 외국어 어휘에 상응하는 두 가지 이상의 고유어 어휘가 첨부되는 예로 보건대, 외국어 어휘와 그에 대한 번역을 단서로 삼아 고유어 물명을 더 널리 포괄하는 어휘 모음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감지할 수 있다. 이규경은 “나물[菜]의 이름이 몹시 많아 다 기술할 수가 없다. 그래서 훗날 산과 들의 늙은이들과 함께 헤아려 증명하고 다시 기록하려 한다”51)는 말로 자신의 긴 목록을 맺고 있는데, 그 이후 이어질 목록에는 고유어 표기가 더 많아질 듯하다.

이덕무와 이규경이 공유한 공유한 언어학적 구도는, 정약용이나 김매순의 그것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이덕무는 ‘閬’이 조선에서만 유독 ‘腎囊’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처럼 조선에서만 통용되는 관습적 용례가 있다는 데 대해 김매순 등과 달리 雅와 俗의 견지에서 가치판단을 하거나 오류이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한어와 몽고어, 일본어 등 역사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를 두루 검토하는 가운데, 자국어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의 사물과 그 이름을 출발점으로 삼아 각국 언어가 보여주는 같고 다른 점에 대해 파악하려는 폭넓은 학적 고찰의 의도가 감지될 뿐, 굳이 그 각국의 언어 사이에 위계를 부여하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지는 개입해 있지 않다고 판단된다. 언어학자로서 이덕무의 이런 면모는 이규경에게 계승되었고, 이규경은 자국어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이라는 점에 있어서 조부보다 확장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46) 案《蒙語類解》凡例, 大書名物, 用中原語, 如鐃鉄嗩吶等, 皆是也. 其下輒以《訓民正音》, 分註蒙古ˎ朝鮮兩語, 今閬亦大書而分註其下, 似是中原語. 然歷考《譯語類解》ˎ 《同文類解》ˎ 《朴通事》ˎ 《老乞》等書, 及諸演義小說, 皆無以閬訓睪丸. 抑亦撰輯者, 以東人本語, 排列於中原之語歟.(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8 〈盎葉記〉 ‘蒙古語’) 실제로《康熙字典》에서 ‘閬’을 확인하면, “門高也; 空虛也; 空曠也; 土閬; 山名; 地名; 寬明貌; 人名; 魍魎也; 明大也; 高大貌” 등의 의미가 등재되어 있을 뿐, ‘腎 囊’이라는 용례는 보이지 않는다.
47) 星湖李氏瀷謂馬鐵, 當稱蹄鐕. 鐕者, 釘也. 《譯語類解》, 稱馬脚匙, 此中國所名也. 日本人馬蹄, 著艸履, 我國冬月, 牛著艸履, 可支三十里.(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9 〈盎葉記〉 ‘馬脚澁’)
48) 屠本畯의 《野菜箋》: 도본준은 명나라의 문인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권58 〈앙엽기〉 가운데 도본준의 《야채전》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규경이 조부의 장서 중 하나인 이 책을 물려받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9) 余今棲山野草萊之地, 采山釣水以爲食. 然山童水渴, 一蔬一鱗, 亦難入口. 常獨坐愛看屠本畯《野菜箋》, 以度餘生. 然山蔬野 䔩, 更不知名, 故略取古書以辨. 莛子부룻대, 赤根菜시근, 苦菜쓴박괴, 一作샤태올. 洛藜도랏, 芢荇비름, 馬蹄菜곰, 酸醬菜숭아, 羊蹄菜솔웃장이, 狗脚腫菜곳다래, 紫花菜도아리, 拳頭菜고사리, 山芹菜물, 貫衆菜희촘이, 搖頭菜둘옵, 莙 薘菜근, 鹿角菜청각, 黃角菜듬복, 薺苨겨루기, 山蔘더덕, 蔞蒿몰쑥, 蔥筆頭종지, 留蒿菜평지, 灰菜명화, 紫菜초죡 기, 蒿草다복쑥, (…) 海蘊, 紫菜감, 紫䓴짐, 海帶베육, 佛甲草돌물, 蒚ˎ䕾ˎ荶, 同蒿ˎ高麗菊쑥갓, 蒲梆부돌주지, 葫蘆旋박으지, 僧帽花도랏, 綠梅花의십곳, 蓮蓬년숑이, 水栗마람, 捲丹花가너리, 水葒花료화, 蒲公草, 一作蒲公英안 방이, 又므은드.(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萬物篇 草木類 菜種 〈山野菜辨證說〉)
50) 다만 이규경이 인용해 쓴 “蔥筆頭종지”는 《역어유해》에는 “蔥筆管종지”라 되어 있다.
51) 菜名甚多, 不可盡述, 以俟後日與山翁ˎ野叟商證更錄.(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萬物篇 草木類 菜種 〈山野菜辨證說〉)

  

Ⅲ. 결론

 

1682년 역관 김지남의 실무적 노력으로 간행된 《역어유해》는 이후 역관층은 물론 사대부에 속하는 식자층 사이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됐다.

권만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문화적 소외감을 강하게 표시하며 중화의 음률을 터득해 제대로 된 한시를 쓰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역어유해》를 비롯하여 한어의 발음을 전사한 일군의 중국어 학습서를 접했으나, 이처럼 당대의 한어 현실을 재현한 결과물은 그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권만의 구도 안에서 중국의 언어는 중화의 언어와 오랑캐의 변종적 언어라는 위계로 나뉘게 되는데, 그가 참조한 《역어유해》는 후자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간주됐다. 그는 16세기 초에 간행된 《사성통해》로 회귀하여 정음, 즉 동아시아 문화권에 통용되는 표준음을 찾고자 했다.

한편 이익의 인용법은 그가 권만과는 상당히 다른 시각으로 《역어유해》를 접했음을 보여준다. 중화의 한자음에 대한 관심으로 《역어유해》에 한글로 부기된 한자음을 주목하였던 권만과 달리, 이익은 조선 땅에서 재배되는 특정한 식물의 구체적 특성을 기술하고 이름을 밝히기 위해, 요컨대 현실에 밀착한 이름으로서 ‘玉薥薥’을 《역어유해》로부터 추출했다. 권만이 漢語의 발음기호를 확인하기 위해 《역어유해》라는 사전을 검색했다면, 이익은 해당 어휘의 지시 내용에 주목한 것이다. 안정복은 스승의 이런 시각을 계승하여 《역어유해》에서 ‘饅頭’라는 한어 어휘를 검색하여 그것이 ‘상화’라는 조선 음식에 상응함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정약용과 김매순에게 주된 관심의 대상은 한글로 표기된 조선의 고유어가 아니라 조선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한자어들이었다. 중국 고전 한문에 뿌리를 두는 이 어휘들이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의대로 정확히 사용되고 있는지가 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 두 사람은 특정한 어휘가 조선에서만 통용되는 관습적 용례를 갖는 데 대해 雅와 俗의 견지에서 가치판단을 하거나 오류이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와 같은 그들의 구도 안에서 중국의 한자어와 조선의 한자어는 상하의 위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반면 이덕무와 이규경이 공유한 공유한 언어학적 구도는, 정약용이나 김매순의 그것과 구별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이덕무는 중립적인 시선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를 검토하며 자국어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나갔고, 이 가운데 각국의 언어 사이에 위계를 부여하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았다. 이규경은 조부의 언어학적 구도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자국어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이라는 점에서 보다 확장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던바, 이는 그가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제시하고 있는 조선의 고유어 物名 목록을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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