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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363(Print)
ISSN : 2465-8138(Online)
Han-Character and Classical written language Education No.50 pp.1-21
DOI : https://doi.org/10.15670/HACE.2021.50.1.1

Things That the Prevalence of Rinderpest Awakened People to in the 17th Century
- In Relation to Utilization Direction of Rinderpest Materials in the Classical Chinese Education -

Kim, Chang-ho
Professor, Wonkwang University
2021년 04월 25일 2021년 05월 17일 2021년 05월 26일

Abstract

This study set out to review what the prevalence of rinderpest awakened individuals and the society to in the 17th century and have contemplation on its utilization directions in the field of school. The prevalence of rinderpest shook up the stability of pastoral life and even caused minute cracks in the solidarity of common people. At that time, the government was hurry to implement a couple of policies, in which process they had a clash with the traditional Confucian values. As rinderpest raged in the nation, it continued to stimulate social discussions about the butchery issue. Since rinderpest happened along with extreme weather events, it drove the lives of people further to the extreme. This atmosphere put a pressure on the society to search for a solution structure. In the future society, meteorological and environmental issues will emerge as social issues, in which sense there is a need to incorporate the problematic consciousness implied by the rinderpest data in the scope of education.

17세기 우역의 창궐이 환기한 것들
- 한문교육에서의 우역 자료 활용 방향과 관련하여 -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한문번역연구소 운영위원

초록

본고는 17세기 牛疫의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환기한 것들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등 학교 한문교육에서 災難 관련 자료를 어떤 방향에서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적은 것이다. 우역이라는 충격 앞에서 개인과 사회는 이전의 삶의 방식과 인습적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의 노동력이 결여된 농경의 삶에서, 사람들은 소가 생활의 중심에 있던 日常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역의 창궐은 전원적 삶의 안정성을 흔들고 기층민의 연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 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連鎖로서 외교 등 의외의 영역에까지도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몇 가지 정책을 서둘러 시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교가치와 충돌하 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역 창궐은 소의 도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계속해서 촉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우역은 기상 이변과 함께 발생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더욱 극단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압력으로서 사회 내에서 해결 구조를 모색하게 했다. 미래 사회에는 기후, 환경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역 자료가 함의하는 문제의식을 한문교육의 범위 안으로 편입할 필요가 있다.

Ⅰ. 머리말

 이 글은 17세기 우역의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환기한 것들에 대해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중등학 교 한문교육에서 災難 관련 자료를 어떤 방향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옛날부터 사람이 모여살고 교류하고 전쟁을 벌이는 곳에는 전염병이 있었다. 전염병은 14세기의 페스트처럼 대재앙으로 번진 적도 있고,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에서 볼 수 있듯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주요인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원인 파악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정치, 문화, 종교의 영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전염병 가운데는 사람에게 감염되지 않으면서 가축에만 피해를 입히는 것들이 있다. 소의 흑사병 으로 알려진 牛疫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우역은 전염의 속도도 빠르고 걸리기만 하면 거의 斃死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근대 수의학의 발달에 따라 종식되었고, 20세기 초 이후에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졌다.
 소는 노동력의 원천인 만큼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稅制 등 국가사회의 모든 면에 연관되어 있었다. 우역은 인조15년(1635) 5월 瀋陽에서 처음 발생한다. 이후 8월에 조선으로 넘어와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농경에 필요한 소의 부족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미친 파급력이 엄청났다.
 전염병이 인류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윌리엄 맥닐1)이나, 재레드 다이아몬드,2) 마크 해리스3) 같은 학자들에 의해 충실한 정리가 이루어져 왔다. 그 가운데 우역은 가축의 전염병 가운데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국내에서도 생태환경사의 관점에서 17세기 우역의 발생과 확산 과정,4) 피해 양상과 농업 위기에 따른 정책적 대응,5) 우역의 주기적 영향이 기근·전염병·虎患에 미친 영향6) 등이 상세하게 다루어 진 바 있다. 한문학 분야에서도 일부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데, 한시와 祭文을 중심으로 우역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과 고뇌양상을 다룬 것7)을 필두로 조선후기 소의 형상에 대한 탐색의 과정에서 우역이 가져온 파장을 다루는 것8)을 볼 수 있다.
 본고는 이상의 성과를 생산적으로 계승하면서, 《실록》, 《승정원일기》와 문집을 대상으로 우역의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미친 영향과 환기한 것들 – 개인 생활·의식 및 사회적 관습, 가치의 면 등- 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발생 시기와 전파 경로, 피해 상황 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반면에 문집에는 우역 관련 작품들이 예상보다 적었다. 따라서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문집 소재 漢詩, 祭文 등과 동일 층위의 자료로 다루면서, 보다 적극적인 읽기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서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우역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가한 충격의 실상과 환기한 것들에 대해 살피게 될 것이다. 이어 우역 창궐에 따른 정책적 대응과 전통 가치의 갈등 문제와 難局의 수습을 위해 전통적 災異論이 부상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미증유의 재앙 앞에서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復元 또는 재설계를 위해 자기조정의 과정을 겪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결론 부분을 통해, 중등학교 한문교육 차원에서의 활용 방향에 관한 개략적인 내용을 덧붙이고자 한다.
 
1) 윌리엄 H. 맥닐 지음·허정 옮김(1992),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한울.
2)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김진준 옮김(1998), 《총, 균, 쇠》, 문학사상사.
3) 마크 해리스 지음·이영석 옮김(2020),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 푸른역사.
4) 김동진·유한상(2013b), 〈병자호란 전후(1636-1638) 소의 역병(牛疫) 발생과 확산의 국제성〉, 《의사학》 제22권 제1호 (통권 제43호).
5) 김동진(2013a), 〈병자호란 전후 우역 발생과 농우 재분배 정책〉, 《역사와 담론》 제65집, 호서사학회.
6) 김동진·유한상·이항(2014), 〈17세기 후반 우역의 주기적 유행이 기근·전염병·호환에 미친 영향〉, 《의사학》 제23권 제1호(통권 제46호).
7) 황만기(2016), 〈우역(牛疫)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과 고뇌양상〉, 《한문학논집》 45권, 근역한문학회.
8) 김창호(2018), 〈조선후기 한시에 나타난 ‘소[牛]’의 형상과 그 의미〉, 《한문교육연구》 51호, 한국한문교육학회.
 

Ⅱ. 17세기 우역 창궐의 양상

 우역은 소의 전염병을 일컫는 일반명사였다. 우역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증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근대 수의학이 도입된 이후이다. 이전 문서에서 우역은 우역, 탄저, 구제역 등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병원체의 구분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용어의 의미상 우역이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되었다. 구제역으로는 폐사하는 일이 거의 없고 상품가치가 훼손되는 반면에, 우역은 높은 폐사율을 보이는데, 특히 한반도와 일본 소의 경우 100% 가까이 폐사하였다.9) 그런 점에서 발생 이후 단기간에 조선 전역을 휩쓴 17세기의 우역은 역사적 개념의 우역이기도 하지만, 실제 우역 바이러스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역은 소와 물소에서 치명적인 감염을 일으키고, 그 외의 우제류도 감수성이 있어 양, 산양, 돼지 같은 가축도 감염된다. 소에서 발생하는 증상은 발열이다. 감염 후 2,3일이 지나면 먹이를 먹지 않고 목이 마르며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눈물, 콧물, 침 등 분비물이 많아진다. 구강점막이나 잇몸에 미란과 궤양이 생기고 심한 설사를 한다. 이것은 장관점막에 생긴 미란과 궤양 때문이다. 설사와 함께 탈수 증상을 나타내고 기진맥진해지며 6일에서 12일 정도에 폐사한다.10)
 조선에서 우역은 이미 16세기에 발생하여 피해를 주었다. 중종 36년(1541)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소가 거의 몰살했다는 기록11), 《승정원일기》 인조15년(1637)의 50년 전에 우역이 있기는 했으나 마을 하나에 불과했다는 내용12) 등에 근거할 때, 16세기에는 일시적인 발생은 있었으나 전국적 규모의 창궐은 없었던 것 같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우역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16세기 말~17세기의 동북아지역의 정세 변화와 전란, 이에 따른 인력과 물자의 이동을 거치면서 어느 시기에 이르러 폭발적인 발생을 보인다. 그 시기가 바로 병자호란 전후의 무렵이다. 1636년 정세 변동의 중핵이었던 瀋陽 일원에서 우역이 발생하여 한반도의 소에 전염되었고 이어 일본 관서 지역에까지 확산하였다. 이 우역은 처음에 심양 일원에 내린 장기간의 호우로 인해 폭발적으로 확산하였다. 이후 조선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병자호란 이전부터 도성과 경기 이북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후 1년 6개월가량 전국으로 전파되면서 소에게 막대한 피해를 일으킨 후, 1638년 2~4월경에 그쳤다.13) 이 시기 조선의 農牛는 우역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우역 바이러스는 강한 병원성을 발휘했고, 이는 높은 폐사율로 이어졌다.14) 《실록》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인조 14년 8월 15일 조의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었다.”는 기록15), 같은 해 9월 21일의 우역이 퍼지자 한성부에서 소의 도살을 금지했다는 기록16)이나 10월 12일의 “西路에 우역이 치성하여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도 없었다.”는 기록17)은 발생 초기의 확산세가 걷잡기 어려운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높은 폐사율을 지닌 우역 바이러스는 짧은 기간에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곧바로 소멸하였다. 이후 20여년 가까이 우역이 재발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30년에 이르는 소의 수명과 면역학적 특성 때문이었다.18)
 현종 대에 이르러 우역은 다시 고개를 든다. 현종 1년(1660) 경흥부에 우역이 크게 번지는 것19)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전국적인 우역의 발생은 현종의 재위 기간 내내 이어졌고 肅宗 즉위 후에도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20) 《실록》에는 현종 1년 7월 28일에 함경도 경흥부에 우역이 크게 번졌다는 기록21)을 시작으로, 강원·충청 양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22), 황해도에 우역으로 인해 소와 官猪까지 죽었다는 기록23), 강원 도24)와 전라도25), 경상도26), 함경도27)에 우역이 크게 돌았다는 기록 등이 보인다.28) 우역이 다시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하여 심각한 피해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말의 倭亂은 농경의 기반을 와해시킬 정도였다. 전쟁으로 인한 경작지의 황폐화도 문제였 지만, 농사에 투입될 소의 몰살이 야기한 노동력 급감이 더 큰 문제였다. 《지봉유설》의 “지난 번 임진년의 倭變 이후에 소가 거의 다 죽어 아녀자들이 직접 밭을 가는데 배나 힘이 든다. 옛 讖說에 전하기를 ‘열 집이 소 한 마리를 공유하고, 아홉 여자가 한 사내를 우러러본다’ 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증험이 된 것이다.“29)라는 내용은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인조 대, 현종 대에 걸쳐 우역의 창궐이라는 시련을 맞게 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몇 가지 방향에서 대응을 했다. 정책적인 방향에서 번식 기반을 없애는 것을 막기 위해 牛禁 정책을 강화했고, 피해가 덜한 지역의 소를 피해가 심한 지역에 충당했으며, 일본에서 소의 도입을 시도하 고 몽골에서는 소를 사서 들여오기기도 했다.30)
 
9) 야마노우치 카즈야 지음·노정연·천명선 옮김(2016), 《우역의 종식》, 한국학술정보. pp.17~20.
10) 앞의 책, pp.18~19.
11) 《중종실록》 36년 2월 1일 기사. “平安道牛隻, 病斃殆盡, 黃海道亦然.”
12)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 9일 기사.
13) 김동진·유한상(2013b), p.77.
14) 김동진·유한상·이항(2014), p.5.
15) 《인조실록》 14년 8월 15일 기사.
16) 《인조실록》 14년 9월 21일 기사.
17) 《인조실록》 14년 10월 12일 기사.
18) 김동진·유한상·이항(2014), p.5.
19) 《현종실록》 1년 7월 28일 기사.
20) 김창호(2018), p.253.
21) 《현종실록》 1년 경자(1660) 7월 28일 기사.
22) 《현종실록》 4년 계묘(1663) 9월 20일 기사.
23) 《현종실록》 4년 계묘(1663) 10월 12일 기사.
24) 《현종실록》 4년 계묘(1663) 12월 10일 기사.
25) 《현종실록》 6년 을사(1665) 9월 23일 기사.
26) 《현종실록》 6년 을사(1665) 11월 5일 기사.
27) 《현종실록》 8년 2월 6일 기사.
28) 김창호(2018), pp.282~284. <부록> 참조.
29) 李睟光, 《芝峯類說》 卷十六, <語言部> 雜說 “頃歲壬辰倭變後, 牛畜殆盡, 婦子力耕, 其功倍苦. 舊傳讖說云, 十家共一牛,
九女仰一夫, 至是驗焉.”
30) 김동진(2013a).

Ⅲ. 우역의 사회적 연쇄와 災變이 환기한 것들

1. 소[牛]가 사라진 농촌의 현실과 사회적 연쇄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우역이 창궐하면서 급속하게 소가 폐사하는 정황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많다. 인조16년(1638) 2월 8일의 《승정원일기》에는 “兩南이 우역 때문에 소가 거의 다 죽었는데, 지나온 곳의 상황은 어떤가?”라는 임금의 질문에, 成以性(1595~1664)이 “종일 걸어도 소 한 마리 보지 못했으며, 수백 호가 있는 마을에 간혹 소 한 마리 정도가 있었습니다.”31)라는 대답을 한다. 확산과 폐사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역의 창궐은 농사의 失期, 노동력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같은 시기인 인조15년(1637) 11월 8일 사헌부가 아뢴 내용에는 남은 소가 백에 한둘도 안 되어 사람이 대신 田畓을 가는데, 열 명이 하는 일이 소 한 마리에 미치지 못하며, 열 집이 하루 동안 하는 일이 소가 하루 동안 간 만큼밖에 못한다32)는 내용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소 대신 말에다 멍에를 지워 田地를 경작하기도33) 했다.

 

이제 봄날이 비로소 따뜻해져 땅의 맥박이 뛰기 시작하고 있는데, 于耜의 절기가 이미 지나가고 擧趾할 시기가 박두했으니, 과업을 완수하도록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게 되었다. 그 런데 牛疫이 한번 크게 번진 뒤로 대신 멍에를 매야 하는 백성의 탄식이 있게 되었으니, 밭갈이 할 쟁기도 쓸모가 없게 되어 비옥한 경작지가 장차 황무지가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백성이 田地에서 일할 때에는 반드시 백 배의 공력을 들여야만 봄철 농사에 어긋남이 없게 되고 추수할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니, 뭔가 권유하고 진작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게으른 자들 을 일으켜 세워 나태함이 없이 일에 종사하게 할 수 있겠는가.34)
 
유백증이 아뢰기를, “소가 없고 나서야 비로소 소의 공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밭을 갈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을걷이를 한 뒤에도 실어들일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매우 늦게 되고, 또 밭에 거름을 낼 수도 없게 되었으니, 농민들은 더 이상 기대할 만한 형세가 없습니다.”하였다.35)

 

31) 《승정원일기》 인조16년 2월 8일 기사. “上曰, 兩南以牛疫, 牛畜殆盡, 所經, 何如耶? 成以性曰, 終日行不見一牛, 間或有 數百家村有一牛矣. 金振曰, 臣父爲大興守, 其邑面只有九首牛, 耕種極難矣.”
32)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1월 8일 기사. “府啓, 今玆大亂之後, 擧國蕩盡, 又値萬古所無之牛疫, 幸而餘存者, 百無一二, 以人代耕, 必用十餘名, 而不及一牛之耕, 耕之數日, 疲困不堪其苦, (缺) 十家一日, 纔得一日之耕…”
33) 《숙종실록》 19년 10월 19일 기사. “忠淸道稷山等六邑, 牛疫熾蔓, 死者無算, 農人至以馬駕耟耕田, 道臣以聞.”
34) 《현종개수실록》 14년 2월 5일 기사. “目今春日載陽, 土脈初開, 于耜之節已邁, 擧趾之期奄迫, 勸課之政, 不容少緩. 而一 自牛疫之熾, 民有赬肩之歎, 畟畟之耜, 無以服之, 澤澤之耕, 其將廢矣. 民之有事西疇者, 必有用功百倍, 然後方可以無失. 東作有望, 西成不有, 以勸諭而振作之, 則亦何能起其惰窳, 而使之趨事不懈哉?” 이하 《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인용 기사는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 내용을 가져왔음을 밝힌다.
35)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0월 9일 기사. “伯曾曰, 無牛之後, 始覺牛之有功多矣. 不特耕田, 秋收之後, 輸入無計, 故秋收甚晩, 亦不得糞田, 農民更無可望之勢矣.”

 

 앞의 글은 현종 14년 2월 팔도 및 개성부, 강화부에 내린 諭旨이고, 뒤의 글은 인조 15년 10월 晝講 후에 있었던 군신 간의 논의의 일부이다. 앞글의 내용은 봄철이 되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것이다. 우역 창궐 이후 정상적인 경작이 어려운 현실에서, 임금으로서 농경에 힘을 다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밭갈이 할 쟁기도 쓸모없게 되고’, ‘비옥한 경작지가 황무지가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임금의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다. 아래는 인조 조 우역 창궐 초기, 소의 滅絶을 염려하던 상황에서의 글이다. “소가 없고 나서야 비로소 소의 공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은, 당연시 했던 소의 勞役을 우역 창궐을 계기로 새삼 생각하게 된다는 상징적인 언급이다. 이어지는 말에 농촌에서의 소의 역할이 하나하나 거론되고 있다. 소는 ‘밭을 갈고’, ‘수확물을 나르며’, ‘거름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런데 대신할 방도가 없고 이 일들을 人力으로 하다 보니 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역으로 인한 개체수의 급감은 노동력 부족을 낳았고, 부족한 노동력은 향촌 사회에서 한정된 소와 관련한 미묘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인조 19년(1641) 6월 26일 조에는 당시 농촌의 현실을 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동부승지 崔有海가 “지금은 牛疫이 지나간 뒤라 부유한 백성은 소가 있으나 서민들은 소가 없어 반드시 많은 값을 주어야만 소를 빌려 밭갈이 할 수 있으므로 田野가 지난날보다 더욱 황폐해지고 있습니다.”36)라는 말을 한다. 주로 부유한 집만 소를 가지고 있고, 서민들은 돈을 주고 빌려야 밭을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사대부계급 분화 과정과 관련을 가지기도 하지만, 우역 창궐 이후 소 개체수의 급감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 한편 소가 없는 처지에서의 窮迫함과 다르게, 소를 가진 이들은 그들대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牛病多死, 人皆憂之, 吾家無牛獨不憂. 然牛盡死, 耕種時借得無處, 獨安得不憂. 偶吟.>
有牛憂病病憂死소 있으면 병 들까 걱정하고 병 들면 죽을까 걱정하니
我本無牛可不憂나는 본디 소가 없어 걱정할 게 없네
但恐人家牛死盡다만 걱정되는 것은 남의 집 소 다 죽으면
西疇有事借誰牛37) 서쪽 밭농사에 어느 집 소를 빌려야 하는지
 
 
36) 《승정원일기》 인조 19년 6월 26일 기사. “全羅兵使黃緝引見時, 榻前同副承旨崔有海所啓, 田野闢, 最是守令爲政之本, 而前日則守令不遑檢督. 卽今牛疫後, 豪民則有牛, 小民則無牛, 必給重價, 然後可以借牛起耕, 故田野益荒於前日.”
37) 유의건, 《花溪先生文集》 권2, p.178.

 

 柳宜健(1687~1760)의 이 시는 가난을 스스로 위로하는 내용이다. 17세기에 두 차례 우역이 창궐한 이후의 농민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염병이 횡행하다 보니 소를 소유해도 병이 들까 염려되고 병이 들면 죽을까 걱정되니, 차라리 소 없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러나 만약 다른 집의 소들마저 전염병으로 다 죽는다면, 빌려 밭을 갈 수도 없게 되니 그것 역시 걱정스러운 일이다. 소를 소유한 자들도 전염병이라는 위험 요인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도 우역을 비롯한 가축의 병에 대한 대처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역의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만큼, 처방이라 하는 것들도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대개는 속수무책으로 농사의 때를 놓치기 일쑤였고, 생계가 막막한 현실에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 질 수밖에 없었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近古에 유례없이 우역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백성들의 명 을 끊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鬼變은 보고 들은 실체도 없이 잘못 와전되어 京外를 진동시키 고 있는데, 이는 귀변이 아니라 人變입니다. 그밖에 위로는 星辰의 변으로부터 아래로는 山川의 괴이함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날이 없고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찌 지금 같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이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따름입니다.”라 하였다.38)

 

38)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8월 29일 기사. “鳴吉曰, 牛疫之熾, 近古所無, 此天所以絶民命也. 況此鬼變, 未有見聞之實, 而襲謬傳訛, 京外震動. 此非鬼變, 乃人變也. 其他上而星辰之變, 下而山川之怪, 無日不然, 無處無之, 豈有如此時耶? 此不容人力, 唯盡在我者而已.”

 

 우역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인조 15년(1637) 8월, 최명길이 임금에게 아뢴 내용의 일부다. ‘하늘이 백성의 명을 끊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을 볼 때 우역은 당시 大災殃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실체의 확인도 없이 우역의 확산과 소의 몰살은 귀신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는 말을 하고, 이것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게다가 ‘성신의 변이나 산천의 괴이함’ 등이 암시하는 불안정한 氣象은 사람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최명길은 이러한 불안감을 주시하면서 우역의 기승은 鬼變이 아니고 人變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변과 도리의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장에서 주목하는 것은 우역의 사회적 파급력이 다. 우역의 기승이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인식, 성신의 변, 산천의 괴이함에까지 연계되어 이해되는 것을 볼 때, 당시 사회에 恐怖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염병이 한 사회의 존속과 유지, 사회 심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우역으로 인한 소의 몰살은 意外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승정원일기》인조 22년(1644) 1월 20일 조에는 淸나라 사신 駝駱 접대에 관한 접대도감의 계가 실려 있다. 청나라 사신이 타락을 가장 좋아하는데 우유의 공급이 어려우므로 경기 각 고을에서 송아지를 낳은 소를 돌아가면서 올려 보내게 할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청나라 사신은 행차 때마다 타락을 요구하였고 관원들은 이것을 마련하느라 애를 먹었다. 우역이 창궐하던 정축년(1637)에는 京畿 각 고을의 소가 부족하자 兩南에서 소를 가져와 길렀다. 그런데 이 官牛마저 늙어 우유가 나오지 않아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에 온 사신 호행장이 계속 타락을 요구하므로 경기 각 고을 民家에서 새끼를 낳은 소를 징발하자는 것이다. 많은 어미 소들이 京城으로 보내졌는데, 이것이 시인들에 의해 詩材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聞太平舘滿繫子母牛, 取酪饋胡敕, 吟賦四絶.>
子母牛從畿甸坊 어미 소들 기내 마을로부터
胡然來繫滿宮墻 무슨 일로 와 궁궐 담에 매여 있나
却聞閣裏天王使 대궐 안 천왕의 사자
不食稻粱索酪漿39) 곡물은 먹지 않고 낙장만 찾는다지
 
<牛鳴行>
老翁肺病睡不成 늙은이 폐병에 잠도 이루지 못하는데
慣聞西隣牛夜鳴 서쪽 이웃에서 밤마다 소 울음소리 들리네
羣牛互鳴鳴聲哀 주고받는 소 울음소리 몹시도 애처로우니
徹夜長嘷戀犢情 밤새도록 울며 새끼 소 그리워하는 마음이리
借問犢兒在何所 새끼 소 어디에 있길래
有此迫腸沉痛聲 이렇게 마음 에이는 침통한 소리 내는가
西隣貴客尊莫比 서쪽 이웃 귀한 손님 매우 존귀한 분이라
主人敬客務盡誠 주인이 공경하여 온갖 정성 힘쓴다지
饌品酪漿無不脩 찬품이며 낙장이며 갖추지 않음이 없어
收聚村牛有乳�� 마을 소들 다 모아 젖을 짜는데
自從牽入朱門裡 어미 소 문 안으로 끌려오고 나면
兒在空邸遭縶維 새끼소는 빈 외양간에 남아 있지
母兮兒飢情所種 새끼가 굶주리면 어미는 마음 가는 법
兒母號咷無已時 새끼와 어미 울부짖음 그치질 않네
霜寒月苦夜正長 서리 차고 달빛 쓸쓸한 밤 길기만 한데
更深人靜聲尤悲40) 밤 깊어 인적 고요할 때 그 소리 더욱 슬프네

(하략)

 
39) 趙又新, 《白潭遺集》 권1, p.172.
40) 尹新之, 《玄洲集》 권6, p.342.

 

 앞의 시는 조우신의 <聞太平舘滿繫子母牛, 取酪饋胡敕, 吟賦四絶.> 5수 중 첫 번째 것이다. 청 사신에게 牛乳를 접대하기 위해 京畿의 민가에서 온 소들이 궁궐 담에 묶여 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작품의 둘째 수에는 “밭 갈며 송아지 젖 줄 겨를도 없는데, 어느 누가 잔인하게 묶어 끌고 왔나(輟耕乳犢猶無暇, 殘忍何人絞出爲)”라는 비판의 내용이 보인다. 동일 제재를 다루면서 문제의식을 보다 핍진하게 표현한 것이 뒤의 <牛鳴行>이다.

 <牛鳴行>은 尹新之(1582~1657)가 지은 것이다. 폐병으로 잠 못 이루는 시인은 늦은 밤 서쪽 이웃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에 익숙하다. 소가 애처롭게 우는 것은 새끼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어미 소는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던 때에, 젖이 나온다는 이유로 도성 안으로 끌려왔다. 6구에서 말하는 ‘귀한 손님’, 곧 淸 사신에게 낙장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尊莫比’는 상대를 높이는 표현이지만 넌지시 비꼬는 심리가 개재되어 있다. 인용 부분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부당한 상황에 의해 어미 소와 새끼소가 떨어져 지내는 모습을 부각한다. 굶주린 채 홀로 외양간에 남아있을 새끼소와 새끼소가 그리워 우는 어미 소. 타의에 의한 모자간의 생이별에 시인은 슬픔과 분노가 중첩된 감정을 느낀다.

 하나의 사건으로서 이 일은, 그 原因을 찾아가면 인조 대의 ‘우역 창궐’과 만나게 된다. “우역의 발생 → 경기 지역 소의 몰살 → 兩南 지역의 소를 경기 지역으로 옮겨 충당 → 1644년 당시 경기 지역 官牛의 노쇠화(개체수 부족) → 官牛의 우유 생산 능력의 부족 → (청 사신의 방문과 타락 요구) → 경기 지역 民家의 새끼 낳은 소의 차출 → 어미 소와 새끼소의 이별 → 시인의 슬픔”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미소와 새끼소의 생이별 발생의 원인이 정축년 우역의 창궐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우역이 예상치 못한 의외의 문제로까지 그 파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사회적 負荷 해소의 모색

 우역의 창궐은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큰 시련이었다. 소가 중심에 있는 목가적 풍경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소가 병 들어 개체수가 줄면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고, 노동력이 부족하면 농업생산력이 저하된다. 농업생산력의 저하는 백성들의 영양 결핍을 낳기 마련인데, 여기에 17세기에 지속된 소빙기 기후의 문제까지 겹쳐 있는 상황이었다.

 

경상 감사 閔蓍重이 치계하였다. “右道의 각 고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닭ㆍ개를 죄다 잡아먹 고 나자 또 마소까지 잡아먹고 있는데 사람마다 도살장이 필요 없이 직접 도살하고 있습니다. 형 세의 급함이 서로 잡아먹기 직전이고 심지어는 굶주린 창자에 고기를 먹자 설사병이 갑자기 일어 나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애초에 마소가 없는 자는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 금 시장의 가격은 겉보리 한 말로 거친 무명 너댓 端과 바꾸기까지 합니다만, 보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左道의 각 고을은 牛疫이 크게 치열한데 저절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또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밑거리 가 이미 떨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으므로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 여역ㆍ이질이 전염되면 즉시 죽습니다. 게다가 旱災와 蝗災가 매우 참혹하니, 앞날의 농사에는 다시 바랄만 한 것이 없습 니다.”41)
 
 
41) 《현종실록》 12년 7월 5일 기사. “慶尙監司閔蓍重馳啓曰: 右道各邑, 饑饉尤甚, 食盡鷄犬, 又及牛馬, 人皆宰殺, 不待屠坦. 形勢之急, 次於相食, 以至飢腸食肉, 痢疾暴發, 死亡相續, 初無牛馬者,坐而待盡. 卽今市直, 皮牟一斗, 至易麤大四五端, 而切無持牟之人. 左道各邑, 牛疫大熾, 自死之肉, 恐或傷人, 使之埋置. 則飢民輩, 乘夜掘食, 仍以致斃者甚衆. 且各邑飢民, 日日雲集, 而賑資已竭, 饋以麥粥, 難望救活, 而癘疫痢疾, 延染卽斃. 加以旱蝗孔慘, 前頭民事, 更無可望云.”
 

 우역의 2차 대유행기인 현종 12년 7월 경상감사 閔蓍重(1625~1677)이 馳啟한 내용이다. 민시중 은 우도의 상황과 좌도의 상황을 각각 말하고 있다. 우도는 흉년으로 인해 기근을 겪고 있는데, 식량이 없어 가축까지 다 잡아먹고 있다. “사람이 서로 잡아먹기 직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饑饉이 극에 달한 상태이며 감염병까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식량의 부족은 물가의 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좌도는 우역이 창궐하고 기근이 발생한데다, 癘疫과 痢疾, 旱災와 蝗災까지 겹치는 등 無望의 상황이다. 백성들은 폐사해 묻은 소까지 몰래 파먹고 탈이 나 죽기까지 한다. 유의할 것은 우역이 당시 한재, 황재 등의 自然災害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우역은 민생만이 아니라 朝庭의 祭享이나 유교적 제례 문제에 있어서도 곤란한 상황을 만들곤 했다. 인조 16년(1638) 1월에는 종묘 제향에 쓰는 中脯의 조달이 어렵자 인조가 노루나 사슴을 대신 쓸 것을 제의한다.42) 현종 6년(1665) 12월 조에는 제주에 우역이 극심하여 犧牲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보고가 보인다.43) 이밖에, 우역 발생 이후 병든 고기 사용의 우려 때문에 연향의 饌膳에 사슴을 대신 써야 한다는 호조의 계,44) 각 고을 향교의 釋奠에 쓰이는 희생을 돼지와 양으로 대신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45) 충청도에 우역이 번져 제사에 바칠 黑牛가 많이 죽었다는 보고46) 등을 볼 수 있다. 제향이나 제례에 제물의 공급이 쉽지 않다는 고충의 토로, 代用 제물에 대한 논의 등은 이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시급한 정책 시행에 대한 요구가 전통적 유교 가치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평 尹遇丁이 아뢰기를, “올해 牛疫이 매우 참혹하게 번져 앞으로 종자가 끊길 염려마저 있습 니다. 일찍이 정축년에 우역이 있었을 때 소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죄를 적용하기 로 令甲에 기재하였으니, 지금도 이 법에 의거하여 통렬히 금하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윤우정은 사람은 귀하고 가축은 천한 의리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47)
 

현종 4년(1663) 9월 우역이 확산일로였을 때였다. 우역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소값이 떨어진다. 그러면 아직 우역이 발생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까지도 소를 서둘러 도살하여 팔려고 했다.48) 도살을 금지해도 곳곳에서 밀도살이 성행했는데, 지평 윤우정은 이것을 방지할 강력한 대책의 시행을 건의한다. 처음 우역의 창궐을 경험한 인조 대처럼, 소를 죽인 죄를 사람을 죽인 죄와 같이 적용49)하자는 것이다. 법률 적용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소의 滅失을 막자는 것인데, 이는 당시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유교 국가의 정치나 교육에서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이라는 차등적 인애관은 기본적인 대전제 였다. 윤우정은 災變의 상황에서 정치적 효과를 위해 이러한 원칙에서 잠시 비켜서고자 했다. 이에 史臣은 사람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유교의 근본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비판을 한다. 이후 윤우정은 이 일로 계속 비난에 시달리다가 12월 10일에 遞任되게 된다.50) 국가적 위기에서의 강력한 정책 시행 국면에서, 정책적 판단과 유교 이념이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윤우정 사건의 발단이 된 소의 도살은 이 시기만이 아니라 조선후기 내내 국가적인 골칫거리였다. 국가에서 소의 개체수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으므로 도살 금지 정책을 유지해 나갔다. 그렇지만 이것은 육식의 욕구와 충돌하는 것이었고, 歲時 열흘 동안 私屠를 허용하는 등 탄력적인 대응을 했지만,51)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밀도살을 통제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이와 다른 각도에서 識者들은 소의 도살이 하늘을 노하게 하여 우역이나 흉년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42) 《인조실록》 16년 1월 4일 기사. “景奭曰: 今當貿取於蒙古地. 臣以必就牛價最歇處買來之意, 言於差人矣. 且目今災異疊見, 民力蕩竭, 宗廟祭享之物, 亦當從便量減. 其中中脯, 牛疫後尤難措備. 沈悅在此, 可以稟定. 上謂沈悅曰: 於卿意何如? 悅曰: 景奭之言是矣. 變通爲當. 上曰: 獵取獐鹿而代用何如? 悅曰: 似好矣.”
43) 《현종실록》 6년 12월 25일 기사. “ 時牛疫熾盛, 八道皆然, 而濟州尤甚, 犧牲將無以供焉.”
44) 《승정원일기》 인조14년 8월 21일 기사. “韓興一, 以戶曹言啓曰, 各日宴享時, 大小膳當用牛肉, 卽今牛疫大熾, 病斃之中, 人不敢食, 雖欲擇其不病者用之, 安知其畜病之有無乎? 用之於宴享數字缺當以生鹿代用, 應用預差竝十五首.”
45) 《승정원일기》 인조16년 3월 7일 기사. “又啓曰, 當此農牛盡斃之時, 一頭之牛, 足活十家之命, 其關重如此, 而比聞各官鄕校釋奠犧牲, 皆依舊用牛云. 若然則春秋兩祭所用, 多至六百餘首, 極爲可慮. 限牛畜興産間, 各官釋奠, 竝令以豬·羊代之, 恐爲得宜, 此意行會于各道監司處, 何如? 答曰, 依啓.”
46) 《현종실록》 5년 8월 23일 기사. “忠淸道牛疫大熾, 前後致斃, 千有餘頭. 祭享黑牛, 亦多致斃, 監司以聞.”
47) 《현종실록》 4년 9월 15일 기사. “持平尹遇丁啓曰: 今年牛疫甚慘, 將有絶種之患. 曾在丁丑牛疫時, 殺牛者如殺人之罪, 著爲令甲, 今亦依此法痛禁. 上從之. 史臣曰: 遇丁可謂不知貴人賤畜之義者矣.”
48) 《인조실록》 14년 9월 21일 기사. “牛疫大熾, 自西而南, 京中死者相繼. 牛價頓賤, 餘存者又先屠殺. 漢城府啓請申明殺牛之禁, 從之.”
49) 《인조실록》 25년 2월 2일. “丙子歲, 牛疫遍於八路, 牛畜幾於絶種, 朝廷禁其屠殺, 與殺人同律, 畜産漸繁, 屠牛牟利者, 投屬宮家, 恣意宰殺.”을 볼 때, 우역 발생 초기인 병자년(1636년, 인조 14년)에 이러한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50) 《현종개수실록》 4년 12월 10일. “持平尹遇丁, 曾爲本職時, 以牛疫爲慮, 啓屠牛者與殺人者同罪, 其後引見時, 諸臣皆以
爲比畜於人, 甚不可. 至是遇丁復入憲府, 以此引避. 憲府啓請出仕, 從之, 其後承召不進遞.”
51) 김창호(2018), p.253.

 

<丁丑歲, 牛瘟大行, 將無遺類, 亦時變之酷者也. 遂以俚語綴韻以記之.>
(前略)
曾聞聖人言 일찍이 성인의 말씀 들으니
滿盈天所疾 가득차면 하늘이 미워한다 하셨네
當今上天意 지금에 하늘의 뜻
雖遠不難測 비록 멀지만 헤아리기 어렵지 않네
國家創牛禁 국가에서 소 잡는 일 금한다고
金科列方冊 금과옥조로 방책에 나열하여
市肆著律令 저자에서 율령을 드러내고
省署亦糾摘 관청에서도 적발을 했네
重農意寓此 농사를 중시하는 뜻 여기에 있으니
聖謨宜莫易 임금의 생각 바뀔 리 없는데
紀綱日漸弛 기강은 날로 점점 해이해지고
法制徒謾設 법제는 느슨하게만 적용될 뿐
屠兒競饕貨 백정은 다투어 돈을 탐내어
椎殺不少恤 쳐 죽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 조금도 없네
連頸百爲羣 몇 백이나 되는 소머리 연이어 놓고
揮刀恣臠割 칼을 휘두르며 고기를 잘라대네
下邑爭視效 하읍에서는 다투어 보고 배워
狼戾尤極欲 흉악한 짓 더욱 마음껏 하지만
守宰謀悅口 수령은 제 입 즐겁게 할 것만 생각하여
恬然不之責 태연하게 여기며 꾸짖지도 않네
人皆飫玉食 사람들 모두 쌀밥 배불리 먹고
必要肥胾齧52) 맛난 살점 꼭 먹으려 하네
(下略)
 
52) 鄭侙, 《愚川先生文集》 권1, p.68.

 

 위의 시는 鄭侙(1601~1663)이 지은 것이다. 1637년 우역 창궐 이후 백성들의 참상을 읊은 장편의 고시이다. 인용 부분은 시 전체의 중반 부분이다. 도살의 성행이 우역의 참화를 불렀다[滿盈 天所疾]는 내용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전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법령으로 소의 도살을 금하고 있고, 이것은 중농 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강이 해이해지고 법의 적용이 느슨해지더니, 사람들이 도살을 자행하며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면서 거리낌 없이 고기를 내어 놓고 팔기까지 한다. 단속해야 할 수령은 호의호식에 빠져 도살을 단속할 줄도 모른다. 일반 백성들도 쌀밥에 고기를 먹는 것을 바람으로 여기며, 소의 도살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국가 기강의 해이, 돈벌이 목적의 도살, 위정자와 백성의 안이함이 결국 정축년 우역의 창궐과 소의 몰살을 초래했다는 내용이다.

 우역이나 흉년을 도살의 後果로 보는 것은 儒者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숙종 9년(1683) 1월 宋時烈(1607~1689)은 箚子를 올린다. 내용 중의 하나가 도살을 금지하는 조목을 따로 만들어 中外에 반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失農이 旱災보다 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흉년이 드는 것은 소를 잡기 때문이라는 程子의 말을 인용하면 서, 소의 힘으로 먹고 살면서 소를 도살함으로써 怨恨의 기운이 和氣를 손상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한다. 이어 선대의 李珥(1536~1584)는 그러한 이유에서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후손도 제사상에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53) 두 세기 후인 19세기의 인물 金平默 (1819~1891)의 시에서도 동일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殺牛嘆>이라는 시에서 “한 해에 벌벌 떠는 소 몇 천 마리나 되는지, 원망의 기운 하늘에 닿아 요사한 기운이 흐르네.”라 했다.54) 국가 차원의 우금과는 다른 맥락에서 凶年이나 牛疫의 원인으로 도살을 지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실록》을 보면 우역과 기상이변이 같은 시기에 발생한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종 9년(1668) 5월 8일에 평안도 지역에 牛疫, 馬疫의 발생 기록과 천둥과 벼락이 치고 거위 알 만한 우박이 내렸다는 기록55)이 함께 나오며, 다음 해에는 황해도 지역에 우역이 크게 번진 기록과 큰 비바람이 불어 곡식이 해를 입고, 불어난 물에 사람이 익사했다는 기록56)이 함께 나온다. 이러한 기록은 기상이변과 함께 엄습한 우역 앞에서 기층민들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사회적 압력으로 사회 내에서 負荷 해소 구조 작동의 필요성을 환기하게 된다.

 

53) 《숙종실록》 9년 1월 28일 기사. “牛疫之後, 所餘無多, 而殺之不已. 我國之俗, 以牛肉爲上味, 不得食則如不可生, 雖有禁令, 而猶不暇顧. 若不別爲禁條, 以頒中外, 則民之失農, 甚於旱災矣.程子以歲凶爲殺牛之致, 仍歎人之無行. 蓋以人食牛力而屠其身, 以致怨氣傷和也. 文成公李珥平生不食牛肉, 故其家尙不以牛肉祭珥. 嗚呼, 今日何能見如此人乎? 伏願以程子李珥之言, 責勵群下焉.”
54) 金平默, 《重菴集》 권1, p.44. “一年觳觫幾千牛, 寃氣窮霄沴氣流.”
55) 《현종개수실록》 9년 5월 8일 기사. “咸鏡道牛馬疫大熾, 前後斃者一萬八千一百餘首. 平安道昌城等十邑, 疾風大作, 雷電霹靂, 雨雹交下, 大如鵝卵, 人物震死, 草木無餘. 道臣以聞.”
56) 《현종실록》 10년 8월 2일 기사. “黃海道新溪、平山、金川、兎山牛疫熾發, 道內各邑七月二十一日大風雨, 各穀被害, 瑞興府渰死於潦水者四人.”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牛疫이 몹시 번져 부림 소가 다 죽고 가을갈이를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하기 때문에 씨앗을 땅에 뿌려도 제대로 심어지기 어렵다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명하는 아뢰기를, “우역이 그러하여 젖소가 많이 죽었기 때문에 우유도 올려올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은 아뢰기를, “우역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다 죽고 심지어는 성 안의 까막까치도 드뭅니다. 이는 바로 보통 재변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의구심에 차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젠가 보니 종묘 후원에 까막까치가 매우 많더니 요즘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禁苑에만 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도 전혀 없습니다.” 하고, 원두표는 아뢰기를, “새라는 것이 기운을 제일 먼저 타는 것이어서 그것이 오가는 것으로 길흉을 점칩니다. 성상 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지금 5년이 되었는데 歲運이 계속 흉하여 백성들이 걱정과 원망을 하 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런대로 무사하다지만 外寇나 다른 재변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 니까.”57) 

 

57) 《현종개수실록》 4년 10월 5일 기사. “左相元斗杓曰: 牛疫甚熾, 耕牛盡斃, 秋耕多以人耕, 故播種亦難入土, 誠非小慮. 禮判洪命夏曰: 牛疫如此, 乳牛多斃, 駝酪不可進御也. 吏曹參判趙復陽曰: 非獨牛疫, 魚鱉皆死, 至於城中, 烏鵲亦稀少. 此乃非常之災, 人心疑懼矣. 上曰: 嘗見宗廟後苑, 烏鵲甚多, 近來不見矣. 太和曰: 非但禁苑無鳥, 城中亦絶無矣. 斗杓曰: 禽鳥, 得氣之先者也, 以其去來, 可占吉凶. 聖上臨御, 于今五載, 歲運連凶, 百姓愁怨. 今雖姑息無事, 安知無外寇他變乎?”

 

 현종 재위 초반인 1663년 우역 창궐 상황에 대한 君臣 간 논의의 일부다. 우역 창궐 이후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와 그 사회의 음산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논의의 중심이 우역의 피해에서 점차 재변 확산에 대한 우려로 옮겨가고 있다.

 좌상 元斗杓(1593~1664)는 먼저 우역이 발생한 뒤로 농경이 어려운 현실을 말하고 있다. 이어 이조참판 趙復陽(1609~1671)은 우역으로 소가 斃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연못의 물고기, 성안의 까막까치도 전에 비해 드물다는 말을 한다. 우역과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해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현종은 종묘 후원에 보이던 까막까치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領相 鄭太和(1602~1673)도 성안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주목할 것은 그 다음의 내용이 다. 원두표는 새가 천지의 기운을 가장 먼저 타므로 그것을 통해 吉凶을 점칠 수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장차 외적의 침입이나 또 다른 재변의 조짐이 아닐까라는 말을 한다. 이러한 언술 말미의 “성상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지금 5년이 되었는데 歲運이 계속 흉하여 백성들이 걱정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은 임금에 대한 염려와 위로의 말이기도 하지만, 災異의 초래와 통치 행위의 잘잘못을 연계하는 전통적인 災異論的 관점이 개재된 것이기도 하다.

 

 약방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祭享에 쓸 黑牛가 갑자기 죽었기에 신이 오늘 병들지 않은 소들 을 막 여염집에 내두어 전염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계속해서 죽어가 일곱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소 전염병 중에서도 독한 것이라서 그럴 것이니, 該司로 하여금 救療할 약물을 찾아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제향할 일 이 매우 염려스럽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희생물에 재변이 생긴 것은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이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災 異로 上聞하지 않고 위에서는 修省할 뜻을 다잡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구료하고 계속 쓸 수 있는 지만 강론하고 있으니, 임금이나 신하 모두 잘못되었다 하겠다.58)
 
 
58) 《현종실록》 4년 6월 2일 기사. “藥房提調金佐明曰: 祭事黑牛猝斃, 臣今日以不病牛, 纔出置閭家, 勿之相染, 今聞斃者連續, 只七首餘在云. 此必牛疫之毒者, 宜令該司, 覓送救療藥物. 上曰: 前頭祭享, 殊甚可慮也. 史臣曰: 犧牲告災, 變之大者. 而下不以災異上聞, 上不以修省加意, 其所講論, 不過乎救療之方, 繼用之道, 可謂君臣俱失之.”

 

 위의 자료와 같은 해 《현종실록》의 기사 내용이다. 제향에 쓸 흑우들이 갑자기 죽자 약방 제조는 남은 소들을 살리기 위해 치료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한다. 이에 현종은 제향할 일이 매우 걱정된다는 답을 하고 있다. 평상적인 대화로 볼 수도 있지만 史臣이 보기에는 君臣 모두가 상황에 대한 이해와 책임의식을 결여하고 있다. 즉 신하의 입장에서는 흑우가 죽은 것은 災異라는 큰 變故이므로 임금에게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해 警覺心을 일깨워야 하고, 임금의 입장에서는 재이의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옳다는 것이다. 앞 자료 말미 원두표의 말이 임금에 대한 긴장 촉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 자료는 君臣 모두 事態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부족함을 개탄한 것이다. 자연재해의 상황에 직면하여, 통치자인 임금을 견제하거나 임금 스스로 恐懼修省이라는 성찰의 계기를 가지게 함으로써, 至誠에 의한 자연계의 해결을 기대하는 한편 재이 발생에 따른 사회적 負荷를 해소하고자 하는 전통적 재이론적 관점이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이론의 맥락에서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禳牛文>, <祈禳牛疫文> 등의 제작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조 15년(1637) 7월 25일 비변사의 계를 통해 제작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계에 따르면, 變異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天神과 地祇가 견책하고 노여워 한 결과다. 따라서 전에 없던 변을 당한 입장에서 祈禳을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詞臣에게 특별히 제문을 짓게 하고 擇日하여 정성껏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의 州와 縣에서 지방관으로 하여금 祭禮를 거행하여 신명의 도움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59) 許穆(1595~1682)의 <祈禳牛疫 文>60)이나 姜再恒(1689~1756)의 <禳牛文>61) 은 이 같은 정책 방향에 따라 지어진 것들이다.

 

59)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7월 25일 기사.
60) 《記言》 권58, p.387. “妖孼成災, 人多疾疫, 牛畜多死. 十翼曰坤爲牛, 洪範曰土爰稼穡, 牛能耕, 稼穡付於土. 牛禍稼穡之災, 無牛則耕不作. 耕不作則稼穡不成, 稼穡不成則無食, 無食則人之類絶矣. 土德, 主子母之仁, 衆生龥號, 相感在鬼神. 守土者, 爲神人之主, 至誠祝禱, 無感則無神, 爲鬼神之羞. 消牛禍以成稼穡, 成稼穡以利生民, 鬼神之責也. 民悅則神悅, 亦永有馨香之報.”
61) 《立齋遺稿》 권8, p.125. “上天孔仁, 生此下民. 民之有生, 以食爲天. 食木世遠, 茹毛俗遷. 神農起土, 后棄樹藝. 爰曁叔均, 服牛堆之. 無菑無畬, 無田不乂. 歷千百代, 莫之敢廢. 耒耟功寡, 耦耕則勞. 黎民乃粒, 不憂不薅. 惟彼牛矣, 農民之本. 天何疾威, 俾牛而癉. 旣病而瘠, 終斃而殞. 一牛之死, 萬牛之僨. 縱有良田, 何以耙之. 縱有嘉種, 何以播之. 生民衣食, 其原將息. 惟山巖巖, 一方所瞻. 民之休戚, 尙或降監. 今余與衆, 奔走告誠. 惟爾有神, 誕將威靈. 攘除災凶, 召集善祥. 俾我坤畜, 濕濕而角. 病者旣蘓, 不病者武. 荒彼百畝, 不憂不膴. 屢惟豊年, 多黍與稌. 下民其怠, 敢忘神惠.”

 

Ⅳ. 맺음말 – 한문교육에서의 활용 방향과 관련하여

 이상으로 17세기 牛疫의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환기한 것들에 대해 검토하였다. 서술한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중등학교 한문교육에서 재난 관련 자료를 어떤 방향에서 다룰 것인지에 대한 간략한 생각을 덧붙임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역의 창궐은 미증유의 災變으로 백성의 생활은 물론 국가 재정, 사회 분위기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충격 앞에서 개인과 사회는 이전의 삶의 방식과 인습적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우역으로 인한 소의 몰살은 상당한 노동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소의 노동력이 결여된 농경의 삶에서, 사람들은 소가 생활의 중심에 있던 日常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역의 창궐은 전원적 삶의 안정성을 흔들고 기층민의 연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連鎖로서 의외의 영역에까지도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예로 우역으로 인한 소 공급의 부족은 駝酪을 좋아하는 淸 사신 접대 문제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소의 母性본능의 침해라는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당시 詩材로 다루어지면서 淸에 대한 분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생활 기반의 와해를 우려하여 몇 가지 정책을 서둘러 시행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교가치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17세기 우역의 창궐은 牛禁의 정책적 기조와는 별개로, 도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계속해서 촉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우역은 소빙기의 기상 이변과 함께 발생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더욱 극단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압력으로서 사회 내에서 해결 구조를 모색하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災異論的 관점의 부상이다. 자연재해에 직면하여 임금에게 성찰의 계기를 가지게 하는 것인데, 至誠을 통해 자연계의 영향력을 기대하거나 사회적 負荷를 해소하게 한 것이다.

 우역 관련 자료는 수업시수, 내용의 위계성을 고려할 때, 현재 학교 현장에서 수업자료로 이용하 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그렇지만 기후, 환경 등이 미래의 사회의 주요 문제로 부상할 것이라는 점에서, 점차 교육 범위 안으로 편입할 필요가 있다. 한문교육에서 다룰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의 소중함이다. 재난 상황과의 대비를 통해, 일상 속에 누리는 평온이 참으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다양한 연쇄의 한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재난 관련 자료를 통해 인간이 사회적 연쇄의 한 지점에 있으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셋째, 생태 교육, 환경 교육과의 연계 속에서 성찰적 사고를 촉진할 수 있다. 넷째, 재난 앞에서의 인간 존엄의 문제이다. 소를 도살한 죄를 사람을 죽인 죄와 같이 처리하자는 건의가 物議를 야기한 것을 보았는데, 갈등 요소를 가진 이러한 문제를 토론 자료로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재난의 상황에서 당대의 가치구조에 기반하여 사회적 負荷의 해결을 시도해 왔다. 현재의 코로나19로 인한 다양한 문제들을 우리가 축적해 온 정신적 자산 위에서 해결 가능하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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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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