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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598-1363(Print)
ISSN : 2465-8138(Online)
Han-Character and Classical written language Education No.50 pp.139-154
DOI : https://doi.org/10.15670/HACE.2021.50.6.139

Classical Chinese Education in the Enlightenment Period Korea (1)
- Reviewing Notation Principles in Official Document -

Yoon, Jaemin
Professor of Department of Classical Chinese, Korea University
2021년 04월 24일 2021년 05월 17일 2021년 05월 26일

Abstract

National Classical Chinese and Chinese Characters Education in Korea faced significant change after the Gabo Reform of 1894. While promoting Classical Chinese literacy was traditionally the main goal of official acdemies - hyanggyo [鄕校], sahak [四學], Seonggyun-gwan [成均館] - as well as local ones - seowon [書院], seodang [書堂] -, common and vocational education that the modern school system persued was designed to improve vernacular Korean language ability under the principle of unity of speech and writing. The national institution Hakh-mu-amun [學務衙門] was in charge of establishing and enforcing modern school system and colloquial-style language policy after 1894 reform. This thesis traces the context of transition period to modern education when Classical Chinese as literary language was losing its influence while Korean vernacular was gaining its hegemony in Korean language life, by analyzing main contents of office and employment regulations of Regulations Governing the Bureau of Scrutiny [Jeongoguk jorye 銓考局 條例] that consisted Hakh-mu-amun system. Subsequently, the thesis reviews the notation principles in official document [公文式] to reveal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language policy of Hakh-mu-amun.

韓國의 開化期 漢文 敎育(1)
- 公文式의 文書 表記 規定 再檢討 -

尹在敏
高麗大學校 漢文學科 敎授

초록

韓國에서 漢字와 漢文에 대한 교육이 국가 차원에서 일대 전환을 이루는 시기는 甲午改革 이후부 터이다. 국가의 鄕校, 四學, 成均館 및 민간의 書院, 書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종래의 전통적 교육은 기본적으로 漢文 能力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가 추구하는 보통교육과 기술 및 직업 교육은 기본적으로 言文一致를 전제로 하는 國文 能力을 바탕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甲午改革 이후 근대적 학교 교육 제도와 言文一致의 語文政策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해 나간 국가 기관은 學務衙門이다. 이 논문은 먼저 학무아문 官制에 나타나 있는 學務衙門의 管掌 사무 내용과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을 규정한 銓考局 條例의 주요 내용을 통해 전통적 교육 체제에 서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漢文이 상대화되고 國文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서 국가의 公式 文書 表記 규정인 公文式의 내용을 재검토함으로써 학무아문 이 추진한 語文政策의 성격과 그 의의를 재조명해보고자 한 것이다.

Ⅰ. 머리말

 韓國의 文字 生活에서는 예로부터 ① 漢文을 사용하는 경우, ② 漢文에 吏讀를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 ③ 漢字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한국어를 表記하는 방식인 鄕札을 사용하는 경우, ④ 漢文에 한글로 된 吐를 섞어서 사용하는 경우, ⑤ 한국어를 한글로만 표기하는 경우[한글 專用], ⑥ 한국어를 한글과 漢字를 혼용하여 표기하는 경우[한글 漢字 混用], ⑦ 한국어를 한글과 漢字를 倂記하여 표기하는 경우[한글 漢字 倂記] 등이 각기 그 특수한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다양하게 이용되어왔다.1) 이용된 文字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국의 문자 생활에서 표기 수단은 한글과 漢字 두 종류가 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이루는 조합의 종류와 성격은 漢文 文法이 主가 되느냐 韓國語 文法이 主가 되느냐에 따라 또 크게 구별될 것이다. 漢文 文法이 主가 되는 글(위의 ①, ②, ④)을 다시 ‘漢文’이라는 큰 범주로 묶고2), 韓國語 文法이 主가 되는 글(위의 ③, ⑤, ⑥, ⑦)을 역시 ‘國文’이라는 큰 범주로 묶는다면, 한국의 문자 생활은 크게 漢文과 國文 두 종류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開化期는 韓國의 文字 生活에서 일대 전환을 이루는 시기였다. 한국인의 삶과 역사를 표현하고 기록하는 주요 표기 수단이 漢文에서 國文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漢字와 漢文에 대한 교육이 국가 차원에서 일대 전환을 이루는 시점 또한 바로 이 시기, 특히 甲午改革 이후부터이다. 국가의 鄕校, 四學, 成均館 및 민간의 書院, 書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종래의 전통적 교육은 기본적으로 漢文 能力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가 추구하는 보통교육과 기술 및 직업 교육은 기본적으로 言文一致를 전제로 하는 國文 能力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甲午改革 이후 근대적 학교 교육 제도와 言文一致의 語文政策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해 나간 국가 기관은 學務衙門이다. 그러나 학무아문이 추진한 이러한 근대적 학교 교육 제도 및 이와 직결되는 言文一致의 語文政策은 그동안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더욱이 국가 의 法律과 命令 등 공식 문서 표기를 國文으로 本을 삼도록 규정한 公文式은 그 의의는 물론 그 문맥적 의미마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이는 학계가 주로 語文 運動의 관점에서 당시의 개인이나 단체의 논쟁적 주장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정작 학무아문이 추진한 語文政策의 성격과 그 의의를 결과적으로 過小評價한 소치가 아닌가 한다.3)
 이에 본 논문은 먼저 學務衙門의 관장 사무 내용과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을 규정한 銓考局 條例의 주요 내용을 통해 전통적 교육 체제에서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漢文이 상대화되고 國文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서 국가의 공식 문서 표기 규정인 公文式의 내용을 재검토함으로써 학무아문이 추진한 語文政策의 성격과 그 의의를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1) 尹在敏(2012), pp.9~10. 참조.
2) 홍종선이 개화기 시대 문장의 문체를 검토하면서, “우리말로 현토하였다고 해도 한문으로 된 문장은, 그 글 자체가 한문” 이라고 한 발상을 따른 것이다. 홍종선(1996). p.36. 참조.
3) 姜明官(1985). ; 李鍾國(1996). ; 임형택(1999). ; 고영근(2000). ; 박붕배(2002). ; 허재영(2002; 2003). ; 김혜정(2003).; 南宮遠(2006). ; 김남돈(2009). ; 全忟鎬(2011; 2012). 참조.

Ⅱ. 學務衙門 官制와 近代的 學校 敎育 體制 構想

 1894년(高宗 31년) 음력 6월 25일4) 甲午改革이 시작되면서 軍國機務處가 설치되자, 군국기무처 는 6월 28일 議定된 議案에서 종래의 六曹를 폐지하고 대신 8개 衙門을 설치하기로 하였는바, 이중 學務衙門에서 敎育을 담당하게 하였다.5) 이 議案에서 학무아문에 관해 규정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학무아문은 국내의 敎育, 學務 등에 관한 政事를 管理한다. (…)
  一. 總務局은 미처 설치하지 못한 各局의 庶務를 관장한다. (…)
  一. 成均館及庠校書院事務局은 先聖과 先賢의 祠廟 및 經籍 등의 事務를 관장한다. (…)
  一. 專門學務局은 中學校, 大學校, 技藝學校, 外國語學校 및 專門學校를 관장한다. (…)
  一. 普通學務局은 小學校, 師範學校를 관장한다. (…)
  一. 編輯局은 國文의 綴字, 各國文의 번역 및 敎課書 編輯 등의 일을 관장한다. (…)
  一. 會計局은 본 아문에서 출납하는 財政 문서를 관장한다. (…)6)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이 학무아문 관제가 科擧를 통한 인재 등용이라는 단선적인 목표와 만 연계되어 있던 전통적 학교 교육 체제에서 보통교육 및 기술과 직업 교육을 중시하는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로의 일대 전환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中學校, 大學校, 技藝學校, 外國語學校 및 專門學校를 관장하는 專門學務局의 임무는 직업 교육과 기술 교육 등 전문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다. 中學校가 專門學務局에서 관장하는 기관으로 제시된 것은 이때 상정한 중학교가 보통교육을 담당하는 오늘날의 중학교와는 그 성격이 달랐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小學校와 師範學校를 관장하는 普通學務局의 임무는 보통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다. 사범학교는 專門敎育 기관에 속하는 것이지만 보통교육을 담당하는 소학교의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보통학무국이 아울러 관장하게 한 것 같다. 國文의 綴字[作文: 인용자], 各國文의 번역 및 敎課書 編輯 등의 일을 관장하는 編輯局은 이상의 전문학무국과 보통학무국이 담당하는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의 필요에 부응하여 설립된 것이라 하겠다.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를 전망하면서 설립된 이상의 기관들과 달리 成均館及庠校書院事務局은 당시에 서울과 지방에 광범위하게 온존하고 있었던 전통적 학교 교육 체제를 배려하여 설립된 기관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成均館及庠校書院事務局이 관장하는 일이 先聖과 先賢의 祠廟 및 經籍 등의 事務라는 것은 국가의 鄕校, 四學, 成均館 및 민간의 書院을 학교 교육 기관으로서보다는 종교적 의미에서 儒敎의 선양 기관으로 그 성격을 한정하는 의미가 더 컸음을 보여준다.7)
 이상에서 살펴본 학무아문 官制의 내용은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를 전제로 하여 작성된 일종의 靑寫眞이기도 하였다. 곧, 1895년 2월 2일자 《官報》에 이른바 ‘敎育立國詔書’를 告示하여 새로운 敎育 制度의 構築을 선포한 것, 이후 漢城師範學校 官制(1895. 4.16), 外國語學校 官制(1895. 5.10), 成均館 官制(1895. 7.2), 小學校令(1895. 7.19), 中學校 官制(1899. 4.4), 漢城師範學校 規則 (1895. 7.23), 成均館 經學科 規則(1895. 8.9), 外國語學校 規則(1900. 6.27) 등이 속속 公布되고 관련 학교와 기관들이 설립된 것은 모두 앞서 公布된 학무아문 관제에 담긴 청사진이 실현된 결과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이하 날짜 표기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5) 南宮遠(2006), p.26. ; 全忟鎬(2011), p.33. 참조.
6) 《高宗實錄》 高宗31년 6월 28일자. “一. 學務衙門, 管理國內敎育學務等政. (…) 一. 總務局, 掌未及設置之各局庶務. (…) 一. 成均館及庠校書院事務局, 掌保守先聖先賢祠廟及經籍等事務. (…) 一. 專門學務局, 掌中學校․大學校․技藝學校․外國語學校及專門學校. (…) 一. 普通學務局, 掌小學校․師範學校. (…) 一. 編輯局, 掌國文綴字, 各國文繙繹及敎課書編輯等事. (…)一. 會計局, 掌本衙門出納財簿. (…)” 이하 조선왕조실록의 원문과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실록 원문 텍스트와 국역 텍스트 및 영인 원문 자료를 참고하여 인용한 것이다. 단, 원문의 口讀와 標點은 필자가 일부 수정했으며, 번역 또한 일부 수정 또는 재번역했다.
7) 물론 인재 양성 기관으로서의 成均館의 성격이 이때 아주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성균관에서 는 경학과를 두고 경학시험을 통해 고종 34(1897)년 20명, 고종 37(1900)년 7명, 고종 38(1901)년 6명, 고종 44(1907)년 33명, 순종 즉위년(1907) 9명, 순종 1(1908)년 35명, 순종 2(1909)년 7명 등 모두 114명에 이르는 인원을 선발하여 부분적으로나마 국가인재를 선발하는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용진(1999), p.345. 참조. 그러나 이는 정례적으로 시행된 행사가 아니었으며 임금의 특명에 따라 應製로서 예외적으로 시행된 행사였는바, 과거제도 폐지 이후 제기된 儒林들의 반발에 대한 무마책 내지는 大韓帝國에 여전히 남아 있던 王朝的 성격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었다.

Ⅲ. 銓考局 條例의 배경과 그 의의

 위의 학무아문 官制를 포함하는 각 아문 관제가 議定된 같은 날(6월 28일) 軍國機務處는 班常을 구별하는 전통적인 身分制를 폐지하여 貴賤에 구애받지 않고 人材를 選用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議案을 올려서 임금의 윤허를 받는다.
 
  軍國機務處에서 議案을 올렸다.
  一. 이제부터는 국내외의 公私 文牒에 開國紀年을 쓴다. (…)
  一. 門閥과 班常의 等級을 劈破하고 貴賤에 구애받지 않고 人材를 選用한다. (…)
  一. 公奴婢와 私奴婢에 관한 법을 일체 革罷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 모두 윤허했다.8)
 
 이 議案의 내용이 가지는 의의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특히 주목되는 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우선, 開國紀年을 쓰기로 한다는 것은 조선 왕조가 전근대적인 朝貢 體制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자주독립 국가가 되었음을 闡明하는 의의를 지닌다. 다음으로, 노비제도 및 문벌과 반상의 등급을 劈破하고 신분의 귀천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것은, 왕에 대한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백성들에 관한 한은 평등한 시민들로 이루어지는 근대적인 시민사회에 대한 전망을 함축하고 있다는 의의를 지닌다.
 결국 이 議案에 뒤이어 바로 며칠 뒤인 동년 7월 3일 군국기무처는 科擧制를 廢止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議案을 올려서 역시 임금의 윤허를 받는다.
 
  軍國機務處에서 議案을 올렸다. (…)
  一. 科文으로 取士하는 것은 조정에서 제도를 정한 것이지만 虛文으로 實才를 거두어들여 등용 하기는 어려우므로 科擧의 법을 변통할 것을 아뢰어 임금의 허락을 받은 후에 별도로 選擧 條例를 정한다. 모두 윤허했다.9)
 
 全世界的 차원에서 산업사회에의 적응을 강제하는 새로운 근대적 환경 속에서 종래의 科文은 이제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虛文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이 議案은 분명하게 명시한다. 이 議案에서 예고한 대로, 동년 7월 12일에 군국기무처는 〈銓考局條例〉와 〈選擧條 例〉를 제정하여 과거제도를 대신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을 발표한다.10)
 
  銓考局條例:
  一. 銓考局은 각 府와 衙門에서 보낸 선발 추천된 사람들을 考試하는 일을 관장한다. 그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普通試驗이다. 다른 하나는 特別試驗이다.
  一. 普通試驗은 國文, 漢文, 寫字, 算術, 內國政略[국내 정치 식견: 인용자], 外國 事情, 內政外事 [國內 政事 및 對外 關係 事情: 인용자]를 모두 시험 문제로 낸다.
  一. 特別試驗은 그 사람이 지참한 추천장 안에 밝혀 놓은바 쓰임에 알맞은 才器에 따라 한 사람 씩 시험 문제를 낸다.
  一. 普通試驗을 치른 뒤 特別試驗에 응시하게 하되, 합격하지 못한 자는 銓考局에서 그 사람을 선발 추천한 府나 衙門에 문서로 통지하며, 합격한 자는 銓試狀을 발급하여 그 기관의 大臣 이 憑考하도록 한다.
  一. 무릇 특별히 銓試狀을 가진 자가 그 기관의 局이나 課 안에서 陞差할 경우에는 굳이 다시 시험을 요구하지 않고 또 退任한 자가 다시 같은 기관에 근무하게 될 경우에는 시험을 요구 하지 않는다.11)
 
  選擧條例:
  一. 各府와 各衙門의 大臣이 그 소관 奏任官, 判任官 등을 選取한다.
  一. 조정의 관리와 민간의 선비, 서울과 지방의 신분 貴賤을 막론하고 品行과 才諝와 藝術[技藝: 인용자]이 있고 아울러 時務를 아는 자를 책임지고 選取하여, 그 사람의 職分․성명․나이․本貫․ 거주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選狀을 발급하여 銓考局으로 보내 능력에 따라 銓考할 것을 청한다.
  一. 選取된 사람은 選狀 안에 그 才器가 어느 局, 어느 課에서 쓰기에 알맞은가를 밝혀 놓고, 銓考局에서 普通試驗에 합격하기를 기다려 다시 特別試驗을 본 다음 各 府와 衙門에서 部 署를 나누어 徵用한다.
  一. 學校를 널리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전에는 議政府에서 五都와 八道에 關飭을 내려 鄕 貢法에 따라 추천하여 올리되, 京畿에서 10인, 忠淸道에서 15인, 全羅道에서 15인, 慶尙道 에서 20인, 平安道에서 13인, 江原道에서 10인, 黃海道에서 10인, 咸鏡南․北道에서 각 5인, 五都 및 濟州에서 각 1인을 서울로 보내, 각기 그 재능에 따라 어느 衙門에 근무하기를 自 願하면 각 衙門의 大臣이 選取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한다.12)
 
 이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은 各 府와 衙門의 奏任官과 判任官13)을 뽑을 때, 그 후보자를 各 府와 衙門의 大臣이 추천하고, 이들을 銓考局의 시험(보통시험과 특별시험)을 거쳐 임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普通試驗에서 출제 범위로 제시한 “國文, 漢文, 寫字, 算術, 內國政略[국내 정치 식견: 인용자], 外國 事情, 內政外事[國內 政事 및 對外 關係 事情: 인용자]” 등은 이 시험이 추구하는 새로운 人材像이 가지는 그 근대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國文14)은 이제 小說이나 時調, 歌辭 또는 內簡에서나 사용되는 글이 아니라 관리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능력의 하나가 되었다. 반면에 漢文은 종래부터 관리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었지만 이제 그 중심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종래 中人 技術官이 담당했던 寫字와 算術이 이제 관리들이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할 보통 능력이 되었다. 內國政略과 外國 事情 및 內政外事는 정치 경제와 국제관계 지식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社會 과목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科擧制가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이 등장한 것은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를 전망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가 미처 마련되기도 전에 과거제를 폐지함으로써, “學校를 널리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전에는 議政府에서 五都와 八道에 關飭을 내려 鄕貢法에 따라 추천”하여 올리라는 규정을 첨부할 수밖에 없었다. 鄕貢法은 지방 州縣의 長官이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으로 보내 시험을 치르게 하는 전통적인 제도의 하나이다. 이처럼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科擧制가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이 등장한 것은 갑오개혁이 갖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성격 및 그 개혁의 상대적 조급성을 반영하는 것이기 도 하다.
 그러나 새로 임용되는 관리들이 익혀야 할 銓考局의 보통시험 출제 범위에 國文이 포함된 것은 실로 중대한 의의가 있다. 言文一致는 근대국가의 가장 중요한 징표이다. 근대국가의 보통교육은 바로 이 언문일치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7월 12일에 議定된 이 〈銓考局條 例〉에 앞서 6월 28일 議定된 각 아문 관제 중 학무아문 관제에서 編輯局이 관장하는 사무로 “國文의 綴字, 各國文의 번역 및 敎課書 編輯” 등을 규정하여 ‘國文의 綴字’를 특기한 것도 國文이 가지는 이러한 의의를 인식한 소산이라고 할 것이다.
 
8) 《高宗實錄》 高宗31년 6월 28일자. “軍國機務處進議案: ‘一. 從今以後, 國內外公私文牒, 書開國紀年事. (…) 一. 劈破門閥班常等級, 不拘貴賤, 選用人材事. (…) 一. 公私奴婢之典, 一切革罷, 禁販買人口事. (…)’ 竝允之.”
9) 《高宗實錄》 高宗31년 7월 3일자. “軍國機務處進議案: ‘(…) 一. 科文取士 係是朝家定制, 而難以虛文收用實才, 科擧之法, 奏蒙上裁變通後, 另定選擧條例事.’ 竝允之.”
10) 鄭求先(1993: pp.66~72. ; 2003: pp.147~152.). ; 南宮遠(2006), pp.27~28. 참조.
11) 《高宗實錄》 高宗31년 7월 12일자. “銓考局條例: ‘一. 銓考局, 掌考試各府․衙所送選擧人. 其試驗有二法. 一, 普通試驗, 一, 特別試驗. 一. 普通試驗, 國文․漢文․寫字․算術․內國政(《官報》의 〈草記〉에는 ‘內國政略’으로 되어 있음: 인용자)․外國事情․內情外事(《官報》의 〈草記〉에는 ‘內政外事’으로 되어 있음: 인용자), 俱發策. 一. 特別試驗, 准該人所帶選狀內所 註明適用才器, 單擧發題. 一. 普通試驗後, 許赴特別試驗, 不中選者, 銓考局具文通知于該人選擧之府或衙. 中選者, 成給銓試狀, 以爲該大臣憑考. 一. 凡特有銓試狀者, 該局․課內陞差, 則不必更要試驗. 又退任者, 復仕同局, 則不要試驗.” 《官報》의 開國 503년 7월 12일자 〈草記〉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으나 일부 글자 出入이 있다.
12) 《高宗實錄》 高宗31년 7월 12일자. “選擧條例: ‘一. 各府․各衙門大臣, 選取其所管奏任․判任等官. 一. 無論朝野紳士․京鄕貴賤, 有品行․才諝․藝術, 兼識時務者, 認眞選取, 詳錄其人職․姓名․年․貫․居住, 發給選狀, 委送銓考局, 請隨材銓考. 一. 豫選人, 選狀內, 注明其才器適用何局何課, 由銓考局, 待中選于普通試驗, 再行特別試, 分局各府衙門, 徵用. 一. 廣設學校作成人材之前, 由議政府, 關飭五都․八道, 依鄕貢法薦升. 京畿十人, 忠淸道十五人, 全羅道十五人, 慶尙道二十人, 平安道十三人, 江原道十人, 黃海道十人, 咸鏡南北道各五人, 五都及濟州各一人, 送詣京師, 各以其才, 願赴何衙門, 聽各衙門大臣選取.’”
13) 관료의 등급 제도는 종래 正從을 합하여 18 品級이었는데, 갑오경장으로 개편된 제도에서는 1․2품에만 正從을 두어 정1품에서 종2품까지를 勅任官, 3품에서 6품까지를 奏任官, 7품에서 9품까지를 判任官이라고 하였다. 《高宗實錄》 高宗31년 7월 14일자. “軍國機務處, 進(…)文官授任式 (…) 文官授任式: ‘第一條, 文官授任. 一曰勅任, 自正一品至從二品. 二曰奏任, 自三品至六品. 三曰判任, 自七品至九品.’” 참조. 李光麟(1982), p.324. 참조.
14) 여기서 ‘國文’이 純國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허재영(2002: 101)은 “이 시기의 ‘국문’은 순우리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러나 당시에 사용되었던 ‘國文’이라는 용어는 실질적으로 대부분 國漢文 混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허재영(2002: 111) 또한 한성사범학교 규칙(1895년 7월 23일)에 보이는 국문 교육 관련 조항을 분석하면서, 이 규칙에 제시된 교과목 “국문과 한문은 모두 ‘강독’을 주로 하였으며, 내용상 국문은 국한문 혼용을 의미한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하고, 이러한 추정의 근거로 “당시 학부 발간 교과서인 《소학독본》과 《국민소학독본》 등이 국문 독본을 위한 교과서인데 국한문으로 발행된 것”을 제시한 바 있다. 이처럼 허재영(2002)이 ‘국문’의 의미를 ‘순우리글’과 ‘국한문 혼용’ 두 가지로 錯綜하여 보는 것은, 곧 살펴보겠지만, 公文式의 문서 표기 규정에 제시된 國文, 漢文, 國漢文 중 ‘國文’을 ‘순우리글’로 보고자 하는 그의 기본 전제에 기인하는 것이다.

Ⅳ. 公文式의 文書 表記 規定 再檢討

 나아가 1894년 11월 21일에 頒布한 勅令 제1호15)에서 公文式을 새로 제정하면서, “法律과 勅令은 다 國文으로 本을 삼고 漢文으로 附譯하며 혹 國漢文을 混用한다.”라고 규정한 것은 언문일 치를 국가 어문 정책의 기조로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해인 1895년 5월 8일에 勅令 제86호로 개정 반포한 公文式에서도 이 규정은 그대로 유지된다.16)
 이 공식 문서 표기 규정은 국가의 문서 표기 형식을 國文, 漢文, 國漢文의 세 가지로 제시하되 國文을 主로 하고 漢文과 國漢文을 從으로 한 것으로 종종 이해되어왔다.17) 그러나 칙령 제1호(1894 년 11월 21일)가 반포되고 나서도 국가의 공식 문서 표기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官報》에 나타나 있는 표기 형식은 대부분 漢文으로 작성되었고, 칙령 제86호(1895년 5월 8일)가 반포되고 나서야 國漢文이 주된 표기 형식으로 《관보》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반면에, 이 무렵에 純國文으로 작성된 것은 〈大君主展謁宗廟誓告文〉과 그 綸音의 純國文本이 유일하다.18) 따라서 칙령 제1호 및 제86호로 반포한 이 공식 문서 표기 규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19)
 그러나 임금이 勅令으로 제정한 규정이 반포하자마자 그렇게 쉽게 法的 拘束力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당시의 《관보》에 나타나 있는 표기 형식이 이때 반포한 공식 문서 표기 규정을 제대로 준수한 결과라고 본다면, 이 규정의 의미는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다.
 사실 “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문장이다. ① ‘以國文爲本’, ② ‘漢文附譯’. ③ ‘或混用國漢文’ 이 셋 사이의 관계는 서로 병렬적인 관계(‘①/②/③’)로 볼 수도 있고, 앞의 둘을 특별한 관계로 묶거나(‘①②/③’), 뒤의 둘을 특별한 관계로 묶어서(‘①/②③’) 볼 수도 있다. 단, ‘以國文爲本’의 ‘本에 주목할 때 단순한 병렬 관계(‘①/②/③’)는 한문 문법에 맞는 해석이라고 볼 수 없다. ‘或’자의 용법에 주목하여 그 앞의 둘을 특별한 관계로 묶을 경우(‘①②/③’), 이 ①②가 하나의 事案을 표현한 것인지 아닌지가 또한 모호하다. 곧, ①의 원칙을 바탕으로 ②에 따른 문서만 작성 公布한다는 것인지20), 아니면 ①의 원칙에 따른 문서와 ②에 따른 문서를 함께 작성 公布한다는 것인지21), 아니면 ①의 원칙에 따른 문서와 이를 바탕으로 한 ②에 따른 문서 중 어느 하나만 작성 公布할 수도 있다는 것인지22)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①②와 ③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도 선명하지 않다. ‘本’자의 의미에 주목하여 그 뒤의 둘을 특별한 관계로 묶을 경우(‘①/②③’) ①과 ②③의 관계 및 ②와 ③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지가 관건이 된다.
 종래의 해석은 ①에 보이는 ‘本’을 대개 ‘主’ 또는 ‘원칙’, ‘근본’, ‘기본’의 의미로 풀이하면서 이어지는 ②③을 ‘從’이나 ‘副’의 위상을 나타냈다고 이해했다. 곧, 이 규정의 의미를 國文을 主로 하고 漢文과 國漢文을 從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관보》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 이 ‘本’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①과 ②③의 관계는 같은 차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主從이나 正副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종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사실 여기 이 ‘本’은 ‘원칙’, ‘근본’, ‘기본’의 의미 외에도 ‘見本’이나 ‘草本’, ‘原本’의 의미로도 풀이될 여지가 많다. 오히려 여기 이 ‘本’을 ‘見本’이나 ‘草本’, ‘原本’의 의미로 풀이하면 이 공식 문서 표기 규정과 《관보》의 표기 형식이 모순되지 않게 이해된다. 國漢文 混用으로 반포한 칙령 제86호의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 本을 삼 漢譯을 附며 或 國漢文을 混用홈”이라고 한 규정에서 ‘本을 삼’라고 한 文句는 오늘날에도 “본을 삼는다.”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사용되는 그 기본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곧, ①과 ②③은 각기 차원이 다른 어문규범을 제시한 것인바, ①이 모든 공식 문서를 먼저 모국어로 작성해야 한다는 원본 문서 작성 규범을 제시한 것이라면, ②③은 해당 문서를 公布할 때 사용하는 국가의 공식 문서 표기 규범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3)
 문서를 작성할 때 먼저 모국어로 작성한다는 원칙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동어반복의 혐의가 없지 않지만, 이 칙령 제1호 및 86호가 주로 상정하는 讀者가 漢文 古文 문서의 작성을 모국어 문서 작성보다 더 편하게 여겼던 인사24)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규정은 근대적인 言文一致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포할 때 사용하는 국가의 공식 문서 표기 형식으로 漢文과 國漢文을 함께 제시한 것 또한 과도적 조치라고 할 것이다. 칙령 제1호가 반포되었을 무렵에는 漢文이 주된 문서 표기 형식이었지만, 칙령 제86호가 반포된 이후부터는 國漢文이 주된 문서 표기 형식이 된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더욱이 여기서 제시하는 漢文은 ‘漢文附譯’이라고 하여, 원본이 되는 國文 문서를 전제로 이를 漢譯한 漢文 임을 밝힘으로써 처음부터 漢文 古文으로 작성된 문서와는 그 성격이 구별됨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5) 따라서 과도적인 조치로서 한시적으로만 존재했던 이 漢文 문서 표기 형식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공식 문서 표기 형식은 실질적으로 國漢文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以國 文爲本’의 ‘國文’은 母國語를 가리키는 것이지 문서 표기 형식으로서의 ‘純國文’을 가리키는 것이라 고 볼 수 없다. 이를 ‘純國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공식 문서 표기 형식을 國漢文으로 한다는 규정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식 문서 표기 형식을 ‘或混用國漢文’(칙령 제1호) 또는 ‘或 國漢文 을 混用홈’(칙령 제86호)이라고 하여 ‘國漢文’을 明記한 것은 앞 구절의 ‘漢文附譯’ 또는 ‘漢譯을 附며’와 비교하여 그 문서 표기 형식을 더욱 분명하게 규정한 것일 따름이다.
 칙령 제86호가 반포된 이후 문서가 대부분 國漢文으로 작성됨으로써 모국어 문법을 따르는 원본 문서를 생략한 채 漢譯 漢文 문서만을 작성 반포하는 일은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황성신문 창간사〉라고도 불리는 皇城新聞의 1898년 9월 5일자 社說에서는 國漢文으로 신문을 발행하는 이유로 ‘公私文牒을 國漢文으로 混用라신 勅敎’를 들고 아울러 ‘近日에 官報와 各府郡 의 訓令指令과 各郡에 請願書報告書’가 다 이를 奉行한 결과임을 밝히기까지 하였다.26) 칙령 제1호 및 제86호에서 제시한 勅敎의 실질적 의미를 國漢文 混用이라고 천명하고 현실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한 漢譯 漢文 관련 내용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1908년 2월 6일자 《관보》에 게재된 개정 공식 문서 표기 규정에서는 관청의 공문서를 모두 國漢文으로만 작성하도 록 하였다.27) 이 개정 규정에서 “從來 公文書類에 使用 文字 國漢文을 交用치 아니고 或 純漢文으로 調製며 吏讀 混用이 已違規例이고”라고 한 언명은 이 규정의 작성자들이 國漢文 混用을 칙령 제1호 및 제86호 이래의 規例로 인식하고 있으며, “或 純漢文으로 調製며 吏讀 混用”하는 것을 이 規例를 위반한 행위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或 純漢文으로 調製며 吏讀 混用”하는 것은 이 칙령 제1호 및 제86호의 규정 이전부터 내려오던, 처음부터 漢文 古文으로 작성된 전통적인 문서 작성 방식을 따른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여기서 지적하는 “或 純漢文으로 調製며 吏讀 混用”한 문서는 앞서 칙령 제1호 및 제86호가 용인했던 저 ‘漢文附譯’ 문서와는 그 개념과 위상이 다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15) 《高宗實錄》 高宗31년 11월 21일자. “勅令 제1호: 朕이 公文式制를 裁可하여 반포하게 하노라. 종전의 공문 반포 例規는 오늘부터 폐지하며 承宣院과 公事廳도 아울러 革罷하라. (…) 公文式: 제1조. 法律과 勅令은 上諭(임금의 諭示: 인용자)로 공포한다. (…) 제14조. 法律과 勅令은 다 國文으로 기본을 삼고 漢文으로 附譯하며 혹 國漢文을 混用한다[勅令第一號: 朕裁可公文式制, 使之頒布, 從前公文頒布例規, 自本日廢止, 承宣院․公事廳, 竝罷之. (…) 公文式: 第一條. 法律․勅令, 以上諭公布之. (…) 第十四條. 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같은 내용이 《官報》 開國 503년 11월 21일자에도 실려 있다. 이 칙령 제1호의 반포는 軍國機務處를 폐지하고 왕이 親政하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16) 《高宗實錄》 高宗32년 5월 8일자. “勅令第八十六號. 公文式, 裁可頒布. 公文式: 第一章. 頒布式. 第一條. 法律勅令은 上諭로 頒布홈. (…) 第九條.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 本을 삼 漢譯을 附며 或 國漢文을 混用홈.” 같은 내용이 《官報》 開國 504년 5월 11일자(제35호)에도 실려 있다. 이전의 칙령 제1호가 漢文으로 반포된 데 비해 이 칙령 제86호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문으로 반포되어 언문일치를 향한 걸음이 더욱 진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허재영(2002), p.103 참조.
17) 姜明官(1985), p.198. ; 허재영(2002), p.102. ; 南宮遠(2006), p.28. ; 全忟鎬(2012), p.100. 참조.
18) 《官報》 開國 503(1894)년 12월 12일자. 참조. 이 〈大君主展謁宗廟誓告文〉과 그 綸音은 각각 漢文, 純國文, 國漢文의 세 가지 표기 형식으로 작성되어 게재되었다. 허재영(2002), p.102. ; 南宮遠(2006), pp.28~29. 참조.
19) 허재영(2002), p.102. ; 南宮遠(2006), p.28. 참조.
20) 칙령 제1호와 칙령 제86호 사이에 작성된 문서들은 이 방식을 따라, 곧 대부분 漢文 문서로만 공포되었다.
21) 칙령 제1호와 칙령 제86호 사이에 작성된 문서들 가운데 이 방식을 따라 공포된 문서는, 앞서 언급한 〈大君主展謁宗廟誓告文〉과 그 綸音을 제외한다면, 없다.
22) 칙령 제1호와 칙령 제86호 사이에 작성된 문서들 가운데 이 방식을 따라 공포된 문서를 찾는 일은 의미가 없다. ①의 원칙에 따른 문서만 공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3) 물론 ‘본보기’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以國文爲本’의 ‘本’을 ‘원칙’, ‘근본’, ‘기본’의 의미로 풀이한다고 하여 안 될 것은 없다. 단, 이 경우에도 이 ‘원칙’, ‘근본’, ‘기본’은 모국어 문서 작성이 원본 문서 작성 규범의 ‘원칙’, ‘근본’, ‘기본’이 된다는 것만을 한정하는 의미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글에서 ‘本’을 ‘見本’이나 ‘草本’, ‘原本’의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고 한 것은 ‘以國文爲本’과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을 主從 또는 正副 관계로 보지 않으려는 고심에서임을 부기한다.
24) 종래의 〈朝報〉 독자와 새로운 〈官報〉 독자 사이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져 가게 되겠지만, 그 초창기에는 아직 그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을 것이다. 종래의 〈朝報〉 독자는 官僚 및 관료 후보군, 곧 양반 사대부 문인지식인층이 그 핵심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25) 칙령 제1호의 ‘漢文附譯’ 또는 칙령 제86호의 ‘漢譯을 附며’라는 표현은 漢文 문서가 모국어로 작성된 원본 문서의 의미를 附記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무렵에 작성된 문서들은 〈大君主展謁宗廟誓告文〉과 그 綸音만이 漢文, 純國文, 國漢文의 세 가지 표기 형식으로 동시에 작성되어 게재되었을 뿐이며, 여타 문서들은 漢文 또는 國漢文으로만 작성 게재되었다. 따라서 이때 게재된 漢文 문서가 과연 모국어 문법으로 먼저 작성된 문서를 漢譯한 뒤 번역의 臺本으로 사용했던 원본 모국어 문서를 생략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古文 漢文으로 작성된 것인지는 사실 확인하기 어렵다. 단, 편법의 소지야 어떻든 공식 문서를 모국어로 먼저 작성해야 한다는 이 칙령의 취지 자체는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26) 《皇城新聞》, 1898년 9월 5일자. 〈황성신문 창간사〉. “欽惟 大皇帝陛下셔 甲午中興之會 適際샤 自主獨立시基礎 確定시고 一新更張시 政令을 頒布실 特이 箕聖의 遺傅신 文字와 先王의 創造신 文字로 並行코져샤公私文牒을 國漢文으로 混用라신 勅敎 下시니 百揆가 職을 率야 奔走奉行니 近日에 官報와 各府郡의 訓令指令과 各郡에 請願書報告書가 是라. 現今에 本社에셔도 新聞을 擴張몬져 國漢文을 交用거 尃혀 大皇帝陛下의 聖勅을 式遵 本意오 其次 古文과 今文을 幷傳코져이오 其次 僉君子의 供覽시 便易을 取이로라.”
27) 《官報》 隆熙 2(1908)년 2월 6일자(제3990호) 〈彙報, 官廳事項〉. “從來 公文書類에 使用 文字 國漢文을 交用치아니고 或 純漢文으로 調製며 吏讀 混用이 已違規例이고 且 外國人으로 本國 官吏된 者가 或 其 國文을 專用며 一般解釋上에 疑誤 慮가 有 더러 規式에 違反되겟기 左開條件을 另定施行 事로 閣議에 決定야 內閣總理大臣이 各部에 照會를 發홈. 一. 各 官廳의 公文書類 一切히 國漢文을 交用고 純漢文이나 吏讀나 外國文字의 混用을 不得홈. 一. 外國 官廳으로 接受 公文에 關야만 原本으로 正式 處辦을 經되 譯本을 添付야 存檔케홈.”
 

Ⅴ. 맺음말

 한국에서 漢字와 漢文에 대한 교육이 국가 차원에서 일대 전환을 이루는 시기는 甲午改革 이후부 터이다.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科擧나 日常生活에 필요한 漢文 能力 培養을 목표로 국가의 鄕校, 四學, 成均館 및 민간의 書院, 書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종래의 전통적 교육 체제에서 보통교육 과 기술 및 직업 교육을 중시하는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로의 일대 전환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방되고 추진되기 시작했다. 科擧制가 폐지되고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이 등장한 것 또한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를 전망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부상하게 된 것이 言文一致의 문제이며 國文 能力이다.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가 추구하는 보통교육과 기술 및 직업 교육은 기본적으로 言文一致를 전제로 하는 國文 能力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甲午改革 이후 근대적 학교 교육 제도와 言文一致의 語文政策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간 국가 기관은 學務衙門이다.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軍國機務處는 8개 衙門을 신설하면서 敎育 부분을 學務衙門이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 公布된 학무아문 官制의 내용은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를 전제로 하여 작성된 靑寫眞이기도 하였다. 곧, 이후에 漢城師範學校 官制, 外國語學校 官制, 成均館 官制, 小學校令, 中學校 官制, 漢城師範學校 規則, 成均館 經學科 規則, 外國語學校 規則 등이 속속 公布되고 관련 학교와 기관들이 설립된 것은 앞서 公布된 학무아문 관제에 담긴 청사진이 실현된 결과들이라고도 할 것이다. 또한 이 학무아문 관제에서 산하의 編輯局이 관장하는 사무 내용에 國文의 綴字가 포함된 것, 이후 科擧制를 대신하는 새로운 관리 임용 방식을 규정한 銓考局條例를 제정하면서 그 시험 과목 중의 하나에 ‘國文’이 포함된 것, 나아가 국가의 公式 文書 表記 규정인 公文式을 새로 제정하면서 국가의 法律과 命令 등 공식 문서를 먼저 國文, 곧 모국어로 작성하고 이를 公布할 때는 漢文 또는 國漢文(나중에는 國漢文으로만)으로 작성하도록 규정한 것은 모두 당시의 학무아문이 언문일치를 국가 어문 정책의 기조로 일관되게 추진해 나간 결과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甲午改革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킨 상태에서 추진되었고, 당시 甲午改革의 추진자들이 모방할 수 있는 근대 기획의 모델 또한 일본을 제외하고는 따로 찾기 어려웠다. 한편, 甲午改革은 일본이 그 직전부터 요구해 왔던 내정 개혁 요구조항들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는바, 일본이 요구하는 내정 개혁안의 핵심은 결국 조선이 淸나라와 관련하여 전근대적인 朝貢 體制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었고, 이는 차후 진행될 조선 植民化라는 일본의 이익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를 전망하는 갑오개혁의 교육 개혁 내용 또한 일본이 요구한 내정 개혁안에 이미 그 대강이 일정하게 제시되어 있었고28), 이는 근대적 학교 교육 체제가 추구하는 보통교육과 기술 및 직업 교육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에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점에서 일정하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갑오개혁이 추진하고 이룩한 그 성과들이 가지는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아무리 他律的인 개혁이라 하더라도 모든 개혁에는 일정하게 自律的인 내부의 요구가 전제되지 않을 수 없기 마련이다. 갑오개혁 당시 결정된 군국기무처의 諸 議案들은 조선 사회 내부의 일정한 요구를 반영하여 이루어 진 것들이며, 당시의 일본은 이들에 일일이 간여할 처지에 있지도 않았다.29) 일본의 실질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갑오개혁은 조선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교육 개혁과 관련하여 당시 학무아문이 추진한 국가 어문 정책 또한 이후의 조선 사회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끝으로 본 논문은 한국의 漢文科 敎育課程의 주요 변천 양상을 검토하는 一環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부기한다.
 
28) 한용진(2010), pp.190~191. 참조.
29) 李光麟(1982), pp.316~3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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